때론 비극이, 때론 코메디가 있지 말입니다_비야프란카델비에르소(11.14
1.
비가 문제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지중해성 기후가 이런 거구나 체험한다. 여름보다 겨울에 강수량이 많다더니.... 여긴 지중해보다는 대서양에 가까운데, 위도가 높아도(43도) 크게 춥지 않고 겨울 강수가 많다. 날씨 앱은 앞으로 일주일 계속 비 소식이다.
비가 와도 바람이 없으니 걸을만하다. 다만 우비와 신발이 적절해야한다. 돈 아낀다고 방수트레킹화를 준비하지 않았더니 낭패를 본다. 작년 봄에는 비 때문에 곤란한 일이 없어서 이번에도 걱정을 안 했더니만 겨울 까미노는 가장 중요한 게 신발이란 걸 알았다.
오히려 겨울비를 즐기며 걸을 수도 있겠다. 판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다만 바람이 심하면 다 무용지물이다.
2.
카카벨로스에서 비야프란카까지 걸었다. 고작 2시간40분만 걷고 비야프란카에서 멈춘다. 정식 명칭은 비야프란카델비에르소. 부르고스 이전의 비야프란카몬테스데오카(Villafranca Montes de Oca)에서 묵은 적이 있기에 비야프란카 이름이 낯설지 않다. 아마도 비야+프란카 조합의 이름이지 싶다.
판초를 쓰고 쉬지 않고 걷다가 만난 첫 쉼터로 비야프란카델비에르소 마을 bar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시하와 태호가 따로 걸었다. 시하는 빠르게 걸어서 태호와 간격을 유지했다. 태호도 굳이 시하를 따라잡으려 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다.
그동안 늘 둘이 끊임없는 수다를 떨면서 걸었는데, 혼자서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게 인간의 한계이자 매력이다. 전기감전사고 이후 여자들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멜 깁슨이 겪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었다. 기억에 여자 감독 작품인데, 성별을 떠나서 남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면 인류는 애시당초 멸종했을 것이다. 알 수 없으니 알 수 있다고 광고하는 이들이 모든 시대에 존재했다. 무당이기도, 절대권력자이기도, 스토리텔러이기도 했고 지금은 심리상담가 간판을 달고 있다. (심리상담가가 독심술사라는 건 아니다. 누군가 시비걸까봐 미연 방지!)
나 또한 마치 독심술을 하는 듯 치장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실수가 많았다. 반성하고 사과할 일이다.
멜 깁슨의 <What Women Want>도 여성 독심술 때문에 주인공 남자는 파멸한다. 영화가 로코라 부드러운 파멸이고 결국 사랑을 찾는다는 결말이지만 “난 네 생각을 알고 있지”식의 구성은 호러 장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세월을 산 탓에 최근 연속으로 악몽을 꾸다가 괴로워하며 깨는가보다.
3.
바르에 들어가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시하가 혼자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았다. 언젠가 내가 말하길 비야프란카에 가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나 보더라. 나는 비야프란카라고 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오리온 알베르게가 있는데, 거기서 10유로에 한국식 고추장 비빔밥을 판다고 말했던 건 사실이다. 작년에 내가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묵었고 비빔밥을 먹었다. 아직 오리온 알베르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나올 것이고, 이제 갈리시아 지방으로 넘어가려고 하니 곧 오리온 알베르게가 나올 거란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오리온 언제 나와요?” 질문을 여러 번 받아서 대답도 여러 번 했던 것. ‘곧’이 비야프란카에 오리온 알베르게가 있다고 와전되고, 시하는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빠르게 걸었던 것.
그러니 비극은 시작됐다. 말 그대로 가슴 저린 드라마의 ‘공연’이다. That’s 메소드~!! 작년 페북을 뒤져서 우리가 벌써 오리온 알베르게를 지나온 걸 확인했다. 오리온 알베르게는 카스트로헤리츠에 있었던 것. 우리가 카스트로헤리츠에서 묵었는데 오리온 알베르게를 몰랐던 건 택시로 카스트로헤리츠 공립알베르게로 곧바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시하가 더이상 걸을 컨디션이 아니라고 해서 택시를 불러 카스트로헤리츠로 점프했기 때문에 오리온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설명하니까 시하는 절망에 빠졌다(빠진 것으로 보였다). 까르푸에서 장을 보면서, 장 본 음식 다 먹을 때까지 매식 없다고 선언했지만, 밖에는 비가 오고 남의 바르에서 음식 꺼내 먹을 수도 없는 터.... 더구나 엎드려 절망감을 표현하는 시하에게 과자와 우유로 끼니를 때우자고 하기에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음식을 주문했다. 핫초코는 이미 한 잔씩 마신 뒤였다.
리조또 식감이 한국쌀 씹는 느낌이고, 토마토 스파게티도 한국에서 먹는 맛이지만 시하는 엎드린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눈치만 보던 태호가 거든다. 다시 브로콜리로 가는 건 어때요.... 부르고스를 늘 브로콜리라고 부르는 태호는 카스트로헤리츠가 부르고스 근처라는 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300km는 될 텐데.... 시간과 비용 모두 불가능해. 이렇게 대답하니 엎드린 채 시하가 레온에서 고추장 팔았잖아요 한다. 고추장이 없어서 한국식 비빔밥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하니 대안을 제시한 거다. 이쯤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어쩌라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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