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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물아홉번째날

멋진 청년 밀양 사람 나선진_트리아카스텔라 (2019.11.18)

by 박달나무

1.


가니까 길인가, 길이니까 가는가. 그래서 질문이 중요하다. ‘가니까 길이냐, 길이니까 가느냐’고 물으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문제로 인식되지만, 간다는 행동과 길이라는 조건은 선택할 수 없는, 즉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스페인 까미노와 우리의 걷기는 한 몸이다. 걷는 자가 없는 길이 까미노일 수 없으며, 길이 없는데 걸을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삶이 그렇다. 수많은 배경과 조건이 함께 하지 않는 “순수”한 삶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까미노에 있으니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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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베르게 밖은 눈이 내리고, 몇일째 쌓인 눈은 그대로다. 할 수없이 제설된 포장도로를 걸었다. 간간히 차량이 지나는 포장도로는 매력이 없다. 한참을 걸으니 발바닥에 무리가 온다. 흙길을 걸을 땐 몰랐다. 이름만 들어 본 족저근막이 당기는 느낌이고, 뒤꿈치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 늘 수다삼매경에 빠지는 아이들도 별로 말이 없다. 아빠랑 붙어 다녔던 태호도 혼자 걷는다. 나에게 눈뭉치를 던지는 태호에게 대거리를 했더니 신이 났다. 피한다고 달렸더니 마구 쫓아온다. 나나 태호나 배낭을 멘 채 2km이상을 걷다 뛰다 했더니 빨리 지친다. 태호는 선생과 대거리가 시큰둥해지자 시하에게 돌아갔고, 나의 기억력 싸움은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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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자를 뜻하는 영어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자주 사용했던 낱말이고, 그에 대한 고민도 나름 골똘했는데 어찌 이렇게 장시간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냐. 자존심에 기억날 때까지 검색하지 않았다.


낱말 뿐 아니다. 작년 봄에 걸은 길인데, 어떤 장소는 어제 지난 듯 선명할 정도로 특정 나무 모양도 또렷이 되살아나지만 어떤 곳은 분명히 지나간지 일년 밖에 안 됐는데도 전혀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혼자 매우 당황하며 걷는다. 당황하는 와중에도 무정부주의 영어단어를 생각하느라 애를 쓴다.


나이 탓이라면 단순히 애달픈 마음으로 넘어가면 될 것이고, 나이 문제가 아니라면 기억에 대해 새롭게 고민을 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 둘 다 뒤엉킨 현상일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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