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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서른번째날

지적폐활량을 늘리기_사리아 (2019.11.19)

by 박달나무

1.


최장거리 걸었다. 26km. 어제 숙소에서 걷기 시작하면 사리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일부러 돌아가는 긴 코스를 선택했다. 풍광이 좋은 길이라고 해서. 태호아빠와 아이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거의 숲속 오솔길이라 분위기 좋았다. 다만 26km는 힘든 일이다. 사리아 도착 후 저녁 먹고 일어서는데 걸음이 떼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장딴지에 알이 배겼다. 아이들도 힘들었다. 아이들이 침대에 누워서 쉽게 잠들지 못한다. 이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조금만 비가 와서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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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호와 아빠가 손을 잡고 걷는다. 사진으로 남긴다. 태호아빠가 스페인에 와서 함께 걷는 이유이고, 스페인에 오길 잘했다는 증명이며, 태호의 까미노 걷기 미션 성공의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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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시간을 거의 쉬지 않고 걸었다. 중간에 쉴 만한 마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를 보니 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우치다 타츠루 선생 지난 11월5일 대전 강연 녹취록을 들었다. 11월4일 서울 강연과 일부 내용은 겹치지만, 원고 없이 얘기함에도 시간 안에 깔끔하게 강연을 진행하는 우치다 선생의 탁월함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친다. 특히 도입을 어떤 얘기로 시작해야 청중을 빨아들일 수 있는지 잘 알고 강연 열기를 서서히 끌어올리는 기술적 측면도 나로선 본 받아야할 일이다.


4.


대전 강연의 주제는 “어른 없는 사회에서 어른을 찾습니다”였다. 몇 해 전에 민들레에서 우치다 선생의 <어른없는 사회>를 펴낸 적이 있다. 원제는 전혀 다르지만 민들레 현병호 대표의 작명으로 알고 있다. 작명할 때 설왕설래했지만 지나고 보니 탁월한 작명이다.


우치다 선생의 지적과 우치다 전문 통역자이자 강연 퍼포먼스의 공동연출자인 박동섭 선생의 언명은 서로 통한다. 우치다 선생은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우열이나 시비를 가리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고 말한다. 세종 때 재상 황희가 떠올랐다. 평소에 박동섭 선생은 ‘지적폐활량을 늘리십시오’라고 말했다. 우리가 우치다 선생을 찾아가기 전부터 박동섭 선생은 지적폐활량에 대해 강조했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우치다 선생과 박동섭 선생의 언명이 일치하는 걸 확인한다.


강연 중 충격적인 지적은 “얼터너티브 팩트”에 대한 진단이다. 미국계 일본인 미치코의 저서에서 인용한 설명인데, 팩트와 팩트 아님의 구분을 거부하고 팩트와 대안적 팩트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수많은 지지자와 함께 있는 사진이 지지자 수를 부풀린 조작이라는 기자의 지적에 “아, 그건 대안적 팩트라고 해야죠”라고 말했다는 것. 충격이다. 이제 거짓말은 단지 대안적 팩트일 뿐이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철면피들 변명의 뿌리를 알았다. 전 세계적으로 물들고 있다는 진단이다.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교묘한 비틀기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결과가 전쟁에 의한 대량학살(세계대전 등)로 수렴되면서 반성적으로 등장하고, 이제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역이라면 모두 공유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길게는 100년, 짧게는 50년을 풍미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음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어린이청소년이나 40 이하 청년들은 찌꺼기만 남은 변형된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독자들이다(전부가 아니라 일부가 그렇다)바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정당하다는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다. 결국 찌꺼기 포스트 모더니즘의 제조자와 퍼뜨린 자는 대형자본이다.


최초의 인구절벽을 맞이한 인류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파멸만이 앞에 있다는 우치다 선생의 진단이다. 우치다 선생은 자칭 타칭 보수 철학자이다. 우치다의 해법은 작은 공동체의 건설과 운영에 있다.


“이런 작은 마을이 갖출 건 다 갖추고(작은 마을이지만 마트, 약국, 은행, 우체국 등) 돌아 가는 게 신기하네요”


태호 아빠의 말이다.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스페인이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 발상지라는 점이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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