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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길재 Dec 07. 2021

연극 「트라우마」 관람 후기

2021. 10월 어느 날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 비록 공연장에서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관람한 연극이 아니라 영상으로 감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의 10년 만인가? 그동안 뮤지컬, 영화, 음악콘서트 등은 매년 5~6편을 관람한 것 같은데 왜 오랫동안 연극을 멀리했을까? 개인적으로도 의문이다. 학창시절엔 극예술연구회 활동도 했고 극단과 협연한 경험도 있는데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나 멀어졌던 것 같다. 우리는 왜 연극을 볼까? 연극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연극은 배우가 무대에서 희곡을 행동과 대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공간과 시간 속에 연출함으로써 시각적이고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다른 어떤 예술 형태보다도 관객과 직접 대면하면서 표현하므로 현장성과 생동감이 넘친다. 드라마에서 배우들은 인생의 어떤 순간, 어떤 시기의 인간의 행동을 그리기 위하여 상상 속의 행동을 하며, 그 행동의 핵심에는 필연적으로 갈등(conflict)이 있다. 이러한 연극적 갈등은 보편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다. 또한, 철학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고 아울러 세속적인 재미도 안겨 준다. 그래서 연극은 우리의 인생을 반영한다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 「트라우마」는 또 다른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2001년 11월 부산시립극단의 정기공연으로 부산문화회관에서 초연된 연극 「트라우마」는 다음 해 제20회 부산연극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구현철, 김인섭의 희곡 작품이다. 연극 「트라우마」는 유폐된 독립가옥을 배경으로 감금된 두 남매가 자신들만의 판타지 속에서 끔찍한 놀이를 수행하는 과정을 독특한 연극적 방법론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심리 공포극이다. 정치적 권력과 폭력의 트라우마를 가진 상처를 잊기 위해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 그로 인해 바깥세계와 단절된 두 남매. 두 남매는 어느 날 외부 세계에서 그들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 남자를 가두고 폭력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자신들의 공포적인 내면의 트라우마를 사내에게 투사하여 또 다른 폭력적 세계가 펼쳐지게 되면서 가족의 트라우마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연극 「트라우마」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엽기적인 공포와 폭력으로 관객들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원시적 야성을 이끌어내고, 관객들은 무대 위의 이러한 공포적 체험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일종의 잔혹 연극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점은 연극의 기원적 측면에서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바로(Jean- Louis Barrault)에 의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상적인 현실을 실제 현실에 투영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연극을 하게 되는 원인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공포의 원인도 없는데 공포감을 갖고 행동을 해봄으로써 실제 인생과 우리의 문제를 인위적 인생의 재창조 과정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또한 공포와 폭력이 우리 속에 잠재된 트라우마에 대해 체험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연극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연극 「트라우마」에는 낯익은 배우인 유재명이 보인다. 배우 유재명은 드라마, 연극, 영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지만 개인적으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도룡뇽의 아버지로 분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유재명은 극 중에서 외진 산장에 숨어 현실과 극단적으로 격리되어 살아가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 중 ‘광’역을 맡았고,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은 무의미한 놀이의 반복과 책읽기뿐인 ‘광’은 길 잃은 낯선 방문객 ‘인’을 살해하는 희생제의를 하는 인물이다. 의학적으로 트라우마 즉, 심리적 외상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에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부적응적 반응을 말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 안전감이 완전히 무너지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가 부서지게 된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되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내 몸과 마음 생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out of control 경험을 하게 된다. 연극 「트라우마」에서 유재명은 광기어린 ‘광’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인간 누구나 크든 작든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한 가지 유념할 점은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사고를 경험해도 어떤 사람은 외상후 스트레스반응을 보이고 다른 사람은 상대적으로 쉽게 충격을 극복하는 사람도 있다. 가정 내에서의 권력에 의한 폭력은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연극은 인생의 어떤 순간, 어떤 시기의 인간의 행동을 보여주면서 때론 보편적이며 또한 개별적인, 그러면서도 철학적인 깊이를 아울러 세속적인 재미도 보여준다. 그래서 때론 난해함을, 때론 즐거움을, 때론 깊은 삶의 철학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연극이 편안함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삶의 한 단면을 보았지만 인간 내면은 잔혹함과 폭력성을 밖으로 들어냄으로써 오히려 정화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은 영화와는 달리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장성으로 더 실감나고 그로 인해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기복과 깊이는 더 오래가고 여운 깊다. 그래서 그동안 연극을 다소 멀리한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트라우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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