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학자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지난주 브런치에 올렸던 에세이의 후속이다.
브런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이제 두 달 남짓 되었다. 매주 글을 쓴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컴퓨터의 흰 화면에 커서가 깜박이는 것만 봐도, 무언가를 입력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목을 조여 온다. 깜박이는 커서가 마치 나를 재촉하는 눈빛 같다.
늘 마음이 무거운 가운데 우연히 눈길을 사로잡는 칼럼을 만났다. 이은혜의 칼럼(중앙일보, 2026. 1. 7. (수) 마음 읽기: 미래로 나아가는 단단한 방법)이었다. 사실 내용보다도 첫 문장이 인상 깊었고, 막막했던 글쓰기에 대해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
이은혜는 이 칼럼에서 자기 자신을 사고의 조정 속에 끊임없이 위치시키는 언어적 실천이야말로 미래로 한발 내딛는 가장 단단한 방법이라고 역설하며, 그 예로 '인류학자의 글쓰기'를 들었다.
"모든 시작은 끝의 실패와 맞물린다."
이 명제는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걸어온 길, 그리고 인류학자가 펜을 쥐고 글을 쓰는 행위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인류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타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결국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실패를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인류학(Anthropology)은 말 그대로 인간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연구한다. 고고학이나 생물인류학처럼 과거와 신체를 다루기도 하지만,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얼굴은 역시 낯선 곳으로 떠나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며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일 것이다.
흔히 인류학을 "약자의 편에 서는 학문"이라고 부른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원주민 연구에서 출발한 이 학문은 현대에 들어 도시 빈민, 이주 노동자 등 소외된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데 주력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학은 단순히 연민에 머물지 않는다. 로라 네이더(Laura Nader)가 제안한 '위로 향하는 연구(Studying Up)'처럼, 금융가나 법조계 등 엘리트 집단을 연구하며 권력의 구조를 파헤치기도 한다. 결국 인류학의 본질은 약자냐 강자냐의 이분법을 넘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찾고 살아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 학문은 거대한 벽에 부딪혔다. 제임스 클리포드가 주도한 '재현의 위기(Crisis of Representation)' 논쟁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에드워드 사이드의 "서구가 동양을 왜곡했다(오리엔탈리즘)"는 비판이 인류학 내부로 침투하여 폭발한 사건이었다.
"과연 인류학자는 타 문화를 올바르게 글로 써낼 수 있는가?"
이전까지 인류학자들은 자신을 투명한 관찰자라고 믿었다. 하지만 클리포드는 "민족지는 투명한 창문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Crafted) 글"이라고 일갈했다. 펜을 쥔 연구자가 대상을 묘사하고 편집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권력 행위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진실은 본질적으로 '부분적(Partial)'일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자기반성이었다. 여기서 'Partial'은 전체가 아니라는 뜻인 동시에, 누군가의 편에 치우쳐 있다는 '편파적'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글쓰기를 멈춰야 할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재현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침묵해야 하는가? 인류학의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쓴다"는 것이다. 다만, 방식이 달라졌다.
클리포드 기어츠가 말한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 그 대안이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라는 얇은 사실의 나열을 넘어, "그 윙크는 나에게 비밀 신호를 보낸 것이다"라는 맥락과 의미를 풍부하게 해석해 내는 것이다. 또한 연구자는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God)처럼 숨지 않는다. 글 속에 '나'를 드러내며(성찰성, Reflexivity), 나의 편견과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아가 연구 대상의 목소리를 편집 없이 싣거나 공동 저자로 내세우며(다성성), 일방적인 독백을 대화로 바꾸어 나간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필드(Field)를 누비는 인류학자다.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거나 정의할 수 없다. 우리의 앎은 언제나 '부분적 진실'일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의 시선은 공정한가?", "내가 이해한 것이 전부인가?", "나의 글(말)이 타인을 대상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투명한 권력자의 자리에 두지 않고, 끊임없는 사고의 조정 속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는 이 치열한 언어적 실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패를 기록하며 다시 펜을 잡는 이 성찰적인 태도야말로, 불확실한 미래로 한 발을 내딛는 가장 단단하고 정직한 방법일 것이다.
새해, 작가로의 화려한 변신이나 많은 구독자 같은 완벽한 성공을 꿈꾸기보다 정직한 실패와 성찰을 다짐해 본다. 그렇게 쓰인 삶의 기록만이 진짜 '두꺼운' 내 인생이 될 테니까. 나는 앞으로도 독자이고 간혹 해석자*이고 어설픈 글쓴이이다.
* 신형철(2014).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계왕개래(繼往開來): 지나간 것을 이어서 미래를 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