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둥 수용소,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독서모임 ‘쉼표’의 뒤풀이 자리에서 회원들과 기억에 남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랭던 길키의 <산둥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 역시 오래전 지인으로부터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함께 소개받아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난 설 연휴 때 <산둥 수용소>를 다시 읽으면서 관련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도 함께 읽으며 인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어려운 극한의 공간에서 인간은 어떻게 변모하며 저항하는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산둥 수용소>는 각각 나치 독일, 구소련, 그리고 일본 점령하의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비극의 현장을 증언한다. 나치의 아우슈비츠가 보여준 인종 청소의 광기, 소련 굴라크의 처절한 노역, 그리고 중국 산둥 수용소의 자치 실험은 억압의 형태는 달랐으나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을 향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아우슈비츠와 굴라크는 인간을 하나의 '물건'이나 '번호'로 취급함으로써 인종살인과 비인간적 대우를 정당화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극도의 굶주림과 구타 속에서 어떻게 '무감각(Apathy)'의 상태로 빠져드는지 분석한다. 타인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 무감각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방어 기제임과 동시에 인간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슬픈 흔적이었다. 도덕적 선택권을 박탈당한 채 오직 생물학적 본능에 침잠하는 모습은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 얼마나 쉽게 야만으로 회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보고서였다.
이러한 극한 환경에서는 이데올로기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기술적 생존 전략이 실존의 전부가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는 내일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저 숟가락 하나를 챙기거나 빵 한 조각’을 숨기는 일에 집중한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고된 노역을 마친 그가 잠자리에 들며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고 회상하는 부분은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처절하고 미세한 지점에서 유지되는지를 역설한다.
반면, 일본 점령하의 산둥 수용소는 앞선 두 곳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일본군은 수용소 내부 행정을 수감자들의 자치에 맡겼고, 이곳엔 선교사, 교수, 사업가 등 지적·도덕적 자부심이 높은 엘리트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자율권이 주어졌을 때 드러난 인간 본성 역시 결코 장밋빛은 아니었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중에서
랭던 길키가 목격한 산둥 수용소는 '합리화된 이기주의'의 전시장과 같았다. 지식인들은 ‘지적인 작업을 해야 하므로 정숙하고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거나 ‘건강 상태가 더 나쁘다’는 논리로 자신의 특권을 '공의'로 포장한다. 또한, 화장실 청소나 쓰레기 수거 같은 힘들고 불쾌한 일은 아무도 하려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권리만 주장할 뿐 의무는 방기 한다. 결국 자치위원회는 설교나 선의만으로는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노동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배급을 줄인다는 식의 강제력(정치적 권력)을 도입하게 되지만 권력을 쥔 위원회는 불신과 파벌 싸움의 중심지가 된다. 이는 도덕적 지식이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인간이 자유를 얻었을 때 이를 공동체가 아닌 사익을 위해 먼저 사용한다는 냉정한 진실을 폭로한다. 또한, 위원회라는 존재에 대해서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다수로부터 일단 권력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부패하거나 편파적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수감자들은 위원회를 비난하면서도 그 위원회가 없으면 당장 밥을 먹지 못한다는 모순에 직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산둥 수용소의 진정한 가치는 이 '추악한 갈등' 그 자체에 있었다. 아우슈비츠에 갈등이 없었던 이유는 인간이 이미 '말하는 물건'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반면 산둥 수용소의 시끄러운 논쟁과 파벌 싸움은 수감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할 주체성을 가진 정치가'로 살아있음을 의미했다. 정치는 이기심을 제거하는 마법이 아니라, 이기심들이 서로 충돌하여 파멸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최소한의 장치'로 작동했다. 굶주림 속에서도 위원회를 열고, 투표를 하고, 배분 원칙을 정하는 그 지리멸렬한 과정이야말로 인간이 짐승으로 추락하지 않게 붙들어준 마지막 보루였다.
이 세 작품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내 파괴되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 영역을 공유한다. 빅터 플랭크는 수용소에서도 자신의 시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할 자유는 인간에 있다고 강조한다. 슈호프는 벽돌을 쌓는 자신의 숙련된 기술 속에서 죄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회복한다. 이기심이 가득한 수용소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소수의 존재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결국 ‘도덕적 선택’에 있음을 역설한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현대 사회의 극단적 진영 논리와 '공정'에 대한 갈등은 수용소의 숙소 배정 논란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나의 이익을 정의로 포장하며, 타인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산둥 수용소>에서의 갈등과 타협과 문제해결과정을 살펴보면, 민주주의란 단순히 자유를 주는 주체가 아니라 강제와 자발적 복종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정치적 예술임을 보여준다. 또한, 공익은 개인의 선량함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과 그에 따른 보상/처벌의 시스템 위에서만 작동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은 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면 성자가 되기보다 정치가가 된다. 즉,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협상하고 공존의 규칙을 만드는 정치적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 정치는 완벽한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고 끊임없이 감시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결하는 길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이 정치라는 제도 안에서 건강하게 소화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희망은 항상 있다. There is always Hope. - BANKSY
수용소는 인간을 파괴하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 무엇인지를 재정의하는 거울이었다. 아우슈비츠가 절망의 끝을 보여주었다면, 산둥 수용소는 비루한 현실 속에서의 정치적 희망을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성인군자가 통치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타인의 이기심과 평화적으로 부딪히며, 그 간극을 '정치'라는 대화로 메워나가는 것. 그것이 수용소의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가장 값진 인류의 유산이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나약한, 그러나 결국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위대한, 우리는 인간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