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탱고의 선율과 함께

- F1963 겨울음악회, <탱고의 야상곡 Tankgo Noturne>

by eduist 이길재
No mistake in the tango, not like life. That makes tango so great. If you get tangled up, just tango on. - 알 파치노, <여인의 향기> 중에서


2026년 2월 28일 토요일 오후 겨울음악회 <탱고의 야상곡 Tango Nocturne>을 관람하였다. 솔직히 겨울음악회라고 하기엔 봄이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었고, 꽃소식과 함께 다음 주부터 각급학교에서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비를 머금은 흐린 하늘과 쌀쌀한 바람이 교차하는 날, 부산 수영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도심 문화공간 F1963을 찾았다.


이곳은 한때 팽팽한 철강 와이어를 뽑아내던 거친 공장이었다. 여느 도심 공장들이 그러하듯, 도시가 확장되면 외곽으로 밀려나 그 자리를 아파트 숲에 내어줄 법도 했지만, 이곳은 서점과 카페, 도서관, 도심 정원 등이 숨 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남는 길을 택했다. 이토록 근사한 선택에 내심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예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의 외형과 투박한 목조 버팀목,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쇠취(金屬臭)는 이곳이 한때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이질적이기보다 오히려 따뜻한 온기로 다가온다. 마치 거친 삶의 애환을 예술로 승화시킨 탱고의 역사와 닮아 있어서일까.


탱고는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도시 ‘라 보카 La Boca’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고향을 떠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건너온 당시 유럽(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하층민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낯선 땅에서 소외감을 달래고자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모여서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들의 음악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리듬인 '칸돔베', 쿠바의 '하바네라', 그리고 유럽의 '폴카' 등이 섞여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것은 가난과 차별 속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강렬한 스텝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호흡은 척박한 삶을 견뎌내려는 의지였는지 모른다. 주류사회에서 벗어난 하층민의 음악과 춤은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클래식 예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오늘의 공연연주자인 아코엔터테인먼트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아르헨티나, 한국의 아티스트들이 모인 다국적 앙상블이다. 오늘의 공연 주제는 <탱고의 야상곡 Tango Nocturne>으로 아코디언(1, 2 아코디언), 바이올린, 더블베이스, 피아노가 앙상블을 이루고 중간에 연주에 맞춰 탱고 댄스가 결합된 공연이다. 원래 야상곡이란 '밤의 정취를 담아낸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음악장르'이다. 공연 제목에 걸맞게 오늘 약간 을씨년스러운 겨울날씨, 아코디언의 선율과 더불어 열정적인 탱고 공연이 조화를 이루어 해 질 녘 겨울을 더 서정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로 만들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공연 프로그램 음악이 비교적 잘 알려진 곡이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공연장인 F1963의 금난새뮤직센터(GMC)는 150석 규모의 작은 공간으로 마이크 없이 연주자의 호흡, 표정, 손끝의 움직임 하나까지도 느끼면서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감상할 수 있는 농밀한 공간이다. 따라서, 그 옛날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여러 민족의 선율이 섞여 탱고가 탄생했던 장면을 연주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공감하는 공연으로 재현하리라 기대했다.


공연의 문을 연 랄로 시프린의 <해 질 녘의 탱고 Tango del Atardecer>는 고된 노동을 마친 이민자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텅 빈 하숙집으로 돌아가며 느꼈을 그리움을 그려낸다. 그 외로움은 아코디언의 바람통을 통해 끊어질 듯 이어지며 애절한 선율이 되어 공간에 사무친다. 이어지는 곡들에서 아코디언은 때론 채찍처럼 날카롭게, 때론 연인의 속삭임처럼 부드럽고 감미롭게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와는 다른, 아코디언만이 가진 그 '숨소리' 같은 질감은 흐린 겨울날의 야상곡과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탱고 리듬으로 편곡된 <La Paloma>, <Besame Mucho>, <O sole mio>가 이어지며 객석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를 시점 영화 <여인의 향기>로 익숙한 <Por una Cabeza>의 연주에 맞춘 댄서들의 무대는 공연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영화 속 괴팍한 시각장애인 퇴역장교인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는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청년 찰리(크리스 오도널)의 따뜻한 용기에 힘입어 다시 생의 의지를 붙잡는다. 영화는 삶의 벼랑 끝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과 품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선택하는 '영혼의 정직함'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진정한 용기이자 의지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명장면 중의 하나가 극 중 프랭크가 아름다운 여인 도나(가브리엘 앤워)와 함께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삶에 대한 강렬한 눈빛과 긴장된 상체와 달리, 하체는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매끄럽고 민첩했다. 서로의 다리를 갈고리처럼 감아쥐는 '가초' 동작과 팽팽한 긴장감 속에 정지하는 찰나의 순간들. 비언어적 소통으로 두 몸이 하나가 되는 그 모습은 ‘인생과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다’ 던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설령 발이 엉키더라도 그저 계속 추면 되는 것(Tango on), 그것이 바로 탱고이자 삶의 본질임을 깨닫는다.


공연은 샹송의 향연을 거쳐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로 이어졌다. 앙코르곡으로 가요 <아모르파티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를 연주했는데 아모르파티라는 제목 자체가 탱고의 정신, 즉 척박한 삶을 견디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이어진 앙코르곡 <밀양아리랑>은 탱고리듬으로 편곡된 선율은 결국 우리의 아리랑의 '한(恨)'과 '흥(興)', 그 정서적 동질감과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관객과 호흡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언제나 깊은 위로를 얻는다. 삶은 결코 예정된 길로만 흐르지 않고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이제 더는 두려움이 없다. 탱고의 스텝처럼, 그저 담담하게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다.


오후 늦게 시작된 공연은 해 질 녘쯤에 마쳤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쓸쓸한 숙소로 돌아갔을 그때 이민자들이 외로움과 쓸쓸함을 풀어줄 탱고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겨 고독을 달랬듯, 나 역시 오늘 공연을 통해 따뜻한 위안을 얻었다. 공연장을 나서는 길, 차가웠던 겨울바람도 다소 누그러지고 어느새 봄의 기운이 가득했다. 나는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일상으로 돌아갔다.









금요일 연재
이전 10화강물에 씻긴 아픔, 바다를 향한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