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인문(人文) 모임 '오늘로'
논어의 첫머리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배움에는 저마다의 때가 있고, 그 배움을 삶에 녹여내는 과정은 참으로 즐겁다. 인연의 소중함을 담아 인문학 모임을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첫 모임의 어색함을 넘어 각기 다른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 그 '때에 맞는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
3월 모임을 가졌다. 1년 전 첫 만남의 어색함은 이제 사라지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따뜻한 안부와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뒤 주제는 책, 사람과의 관계 등 다양한 소재를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의 마음 한편 깊이 스며든 한 단어가 기억에 남았다.
시우(時雨), 때맞춰 내리는 비
농경사회에서 때맞춰 내리는 비만큼 귀하고 반가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래서인지 때에 맞는 좋은 비를 나타내는 비의 종류도 많다. 식물 성장에 더없이 귀한 춘우(春雨), 농작물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비라고 해서 단비/감우(甘雨), 때맞춰 내리는 좋은 비 가우(佳雨, 嘉雨) 그 외에도 약비, 복비(福雨)가 있다. 구한봉감우(久旱逢甘雨)는 '오랜 가뭄에 내리는 단비'라는 뜻으로 큰 어려움 끝에 만나는 다행스러운 일을 의미한다.
시우(時雨)는 우리 모임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마른 대지가 단비를 기다리듯, 인문학적 갈증을 느끼는 순간마다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찾아와 마음을 적셔준다. 이러한 시우(時雨)의 의미는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가 지은 춘야희우(春夜喜雨) 즉,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라는 시에 오롯이 담겨 있다.
춘야희우(春夜喜雨)/두보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내릴 시절을 알아서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봄이 되니 이내 내리네.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만물을 적시는데 가늘어 소리도 없구나.
때를 알고 내리는 비는 '타이밍'과 '배려'를 동시에 담고 있다.
좋은 비는 내릴 시절을 안다. 상대의 상황을 살피지 않고 쏟아내는 감정은 '폭우(暴雨)'가 되지만, 상대가 필요할 때 다가가는 마음은 '시우(時雨)'가 된다.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적신다.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관계, 요란한 고백보다 소리 없이 스며들어 상대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배려의 미학을 보여준다.
'호우지시절' 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나의 청춘시절 감성에 가장 잘 맞았고 좋아했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이다. 미국 유학시절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던 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는 시간이 흘러 청두에서 재회한다. 단조로운 일상에 살고 있는 동하와 아픈 과거를 묻어둔 메이의 만남에서 내리는 비는 메마른 감정을 적시는 단비 역할을 한다. 메이는 동하와 함께 비를 맞고, 비 피할 곳을 찾고, 다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씻어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청두의 '두보초당'은 시인 두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두보의 시 춘야희우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특히, 두보초당의 비 내리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보다도 아름답다. 사랑에도 때가 있을까? 영화는 답한다. 기억 속의 감정이 현재의 설렘으로 다시 드러나는 그 순간, 비로소 '좋은 비'가 내린다고.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지금은 달라졌을까?"
- 허진호 감독 영화 <호우시절> 중에서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을 가진 우리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낯섦과 친숙함,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를 오가며 각자의 삶에서 체득한 통찰을 나누는 시간이야 말로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의 참 뜻이 아닐까 싶다.
좋은 비는 언제 내려야 할지 스스로 안다. 누군가의 마음이 가물 때 소리 없이 다가가 적셔주고, 더불어 누군가 꽃을 피우려 할 때 기꺼이 자양분이 되어 주는 '지혜로운 인연'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랑과 우정은 결국 시우처럼 오는 것,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내 곁에 스며든 당신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