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뱅크시 사진전을 다녀와서
뱅크시 사진전 [Who is Banksy] by Martinbull을 다녀왔다. 21세기 가장 논쟁적인 작가이자 거리의 예술가, 혹은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뱅크시, 그의 발칙한 흔적들을 영국의 뱅크시 전문가 작가 마틴 불의 기록을 통해 마주했다.
솔직히 나에게 '그래피티(graffiti)’는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외국 여행 중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성당이나 유적지, 정갈한 도심과는 달리, 인적이 드문 지하철역이나 후미진 담벼락, 경기장, 심지어 지하철 전동차에까지 스프레이로 휘갈겨진 낙서들을 볼 때면 눈살이 먼저 찌푸려지곤 했다. 그러나 나의 선입견과는 무관하게 그래피티는 이제 단순한 낙서를 넘어서 자유로운 표현과 도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예술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뱅크시의 정체성은 ‘익명성’이라는 가면 위에 세워져 있고, 그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는 사회적 메시지가 들어선다. 그는 익명을 통해 권력의 감시를 비웃고, 예술을 갤러리라는 성역에서 거리라는 광장으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이 익명성은 양날의 검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책임 없는 비겁함이라 비판하며, 자본주의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그의 반항마저 고가의 상품으로 박제해 버린다. 뱅크시의 저항이 ‘비싼 저항’이 되어 다시 자본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 기이한 순환은 현대 예술이 마주한 거대한 한계이기도 하다. 한편, 뱅크시가 직접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행보가 과연 익명성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흔히 말하는 신비주의 또는 노이즈마케팅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이미 상업주의, 예술의 자본화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수천 년간 미학자들이 매달려온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해, 비전문가인 나는 나만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예술이란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실존해야 하며(물론 동일인일 수도 있다), 그 만남을 통해 감상자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미'를 전달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만약 작가의 화려한 수식에도 불구하고 감상하는 나에게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무미건조한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현대 예술계는 소유에서 경험으로, 관조에서 참여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뱅크시는 예술이 거리의 소외된 자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외치며 시스템의 균열을 낸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그 메시지의 강렬함을 넘어, 감상자의 내면에 깊은 파동을 일으켜 삶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얼굴 없는 예술가 뱅크시는 보다 직접적이고 발칙한 방식으로 나의 전제에 부합한다. 그는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제도의 권위를 조롱하며, 거리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감상자와 직접 대면한다. 낙찰 직후 파쇄된 그의 그림처럼, 뱅크시의 예술은 작가의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 상황을 목격하고 해석하는 대중의 반응을 통해 완성된다. "이것이 왜 예술인가?"라고 묻는 나에게 뱅크시는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나의 상식을 뒤흔드는 위트를 던질 뿐이다. 그 위트가 나에게 즐거움이나 사회적 각성이라는 의미로 치환될 때, 그의 낙서는 비로소 위대한 예술이 된다.
전시를 관람하면서 몇 해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머릿속을 스쳤다. 현대 미술의 가장 도발적인 아이콘 뱅크시(Banksy)와 조선 문인화의 정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예술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한 명은 현대사회의 모순을 찔러내는 '거리의 확성기'로, 또 한 명은 극한의 고독 속에서 길어 올린 '침묵의 소나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뱅크시의 작품이 찰나의 지적 유희와 시원한 해학을 주는 '확성기'라면, <세한도>는 볼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주는 '거울'이다. 제주 유배라는 혹독한 겨울 속에서 그린 이 그림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선 ‘정신의 기록’이다. 메마른 붓질로 그려진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지조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는 한 번 보고 이해하면 소진되는 ‘스낵’ 같은 예술이 아니라, 곁에 두고 매일 마주하며 자신을 비추어보는 영속적인 예술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뱅크시가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확성기를 든 투사라면, 김정희는 내면의 뜰에 깊은 뿌리를 내린 수행자다.
예술은 시대의 모순을 고발하는 ‘도구’인 동시에, 인간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구원’이어야 한다. 뱅크시의 기발한 풍자에 환호하면서도 우리가 <세한도>의 묵직한 울림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예술이 결국 ‘재미’를 넘어 ‘삶의 지지대’가 되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모든 예술을 상품화하려 할지라도, <세한도>의 여백처럼 소유할 수 없는 영감의 공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 여백 속에서 오늘도 나만의 소나무를 심으며,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완성해 나간다.
예술을 무엇으로 정의되든, 예술을 접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되었든, 미술관이 되었든, 비용도 발품도 팔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감동이든, 즐거움이든, 혹은 불편한 성찰이든, 내 안에서 무언가 '받아들임'이 일어나는 순간 나는 길가의 돌멩이들 사이에서 빛나는 진주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예술은 결국 발견이며, 낯선 나를 발견하는 도구이다. 뱅크시의 풍자 속에서 세상의 민낯을 보았고, 세한도의 여백을 보면서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마틴 불의 말로 갈무리하고자 한다.
"거리예술은 거리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