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카메라에 대한 추억
서재의 한 모퉁이 여러 물건과 함께 쌓여 있던 카메라 가방에서 Nikon FM2를 꺼냈다.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과 특유의 쇠냄새가 느껴진다. 카메라를 집어 사진촬영 포즈를 취해 보았다. 요즘의 디지털카메라와는 다르게 단단하고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고가인 데다 나의 첫 SLR 카메라였기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만져보고 싶어 하던 아이에게조차 선뜻 맡기지 않았던 애지중지하던 물건이었다.
한때 젊은 세대들 사이에 필름카메라에 대한 레트로 붐이 일었다. 나도 옛날 생각에 이끌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메고 잠시 출사를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현상할 곳도 마땅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금방 뒷전으로 밀려났다. 최근 서재 정리를 하면서 카메라를 확인하니 그 안에 미처 다 감기지 못한 필름이 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필름에 어떤 장면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당시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지금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필름을 현상하는 곳이 있는지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오래된 옛날 카메라를 취급하는 원도심의 상가가 아니라 조금은 의외의 장소였다.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전포카페거리를 찾았다. 그곳은 국내외 젊은 세대 사이에 핫플레이스로 이름난 곳이다. 마침 찾은 날은 부산에서 보기 드물게 영하로 떨어진 쌀쌀한 날씨였지만, 주말을 맞은 거리엔 젊음의 활기로 가득했다. 예쁘고 세련된 카페와 아기자기한 소품점들, 다양한 음식점, 옷가게 등이 넘쳐나는 의외의 장소에 자리 잡은 필름현상소는 조금은 이질적이면서 묘한 반가움을 주었다. 요즘 젊은 세대가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옛 감성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의 지나온 시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문화가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에게는 여러 대의 가메라가 있다.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담기 위해 시작된 카메라에 대한 열정은 필름카메라와 SLR, 그리고 DSLR로 이어졌다. 하지만 '손 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귀한 대접을 받던 무거운 카메라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디지털은 편리했고, 앞으로 더 편리해질 것이다. 휴대성 좋고 성능 뛰어나고 수백 장을 찍어도 부담이 없고, 그 자리에서 확인도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한 뭔가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수만 장의 사진이 각자의 휴대전화 속에 쌓여가지만, 정작 언제부터인가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사진을 공유하며 대화하는 시간은 줄어만 간다. 특히, 자녀가 성인이 되어 각자의 공간으로 떠남에 따라 휴대전화 속의 사진들은 찍고 확인하고 축적되는 데이터일 뿐, 예전처럼 손에 쥐고 만져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온기는 사라진 듯하다. 무엇보다도 현상소를 오가며 느꼈던 '기다림과 설렘'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
그래서인지 이번 현상소 방문의 발품이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상된 사진들을 보니 예전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던 감정이 떠오른다. 오래된 필름으로 촬영했고 다시 몇 년 만에 카메라에서 꺼내 현상한 사진이라 예상은 했지만, 첫 10여 장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려 실망스러웠다. 다행히 그다음 컷부터는 조금씩 화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10여 장은 필름카메라 특유의 색감이 잘 드러나게 잘 나와서 좋았다.
사진 속에는 내가 즐겨 찾는 경주 서출지의 풍경이 담겨있다. 고향이 경주라 어렸을 때 부모님과도 가끔 가는 곳으로 어른이 된 후에도 자주 방문하곤 하였다. 기억은 흐릿하나 사진은 분명했다. 2020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마침 준설공사 중이라 못의 물도 빠져 있었고, 오래된 필름 특유의 입자감으로 사진은 마치 1900년 초반의 낡은 엽서 속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 손을 잡고 갔던 그 시절의 모습과 닮은 듯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진은 순간을 담지만, 추억은 그 앞뒤의 시간을 복원한다. 의대정원을 둘러싼 갈등으로 수업이 멈췄던 지난 1년 6개월은 의대생이었던 아이나 부모 모두에게 고단했던 시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멈춤 덕분에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았다. 모처럼 시간을 맞춰 다녀온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한 장, 필름의 거친 입자 속에 따뜻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사진은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이끈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바로 확인할 수 없다. 필름 SLR카메라의 경우 조작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초점과 구도를 맞춰 촬영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휴대폰의 화면을 보는 대신 작은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세상은. 익숙하지 않은 조작으로 초점을 맞춰 아이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 벌써 잊혔을 장면이 3년의 시간을 두고 현상하여 보니 지금보다 조금 더 젊다.
현상소를 나서며 필름 2통을 새로 샀다. 필름카메라는 불편하다. 기다림을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하며, SLR의 경우 조작법도 까다롭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이 불편한 시간을 즐기고자 한다. 초고화질의 세상에서 조금은 흐릿해도 세상의 온기를 포용하는 순간들을 느끼고 싶다. 한 컷 한 컷 신중하게, 그리고 현상되고 인화된 사진을 기다리는 시간을 설레며 맞이하고 싶다. 필름을 넣고 감고, 무겁고 또한 셔터음도 투박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담긴 색감만큼은 깊고 따뜻한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순간을 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