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의 아름다운 집 '유로가(家)'에 대한 작은 생각
저출생 고령화 사회로 급격히 인구가 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택수요에 대한 양극화가 심각하다. 새로운 주택지로 부상하는 곳은 아파트가 신축되어 인구가 밀접하는데 반해, 원도심은 인구감소에 따른 빈집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대도시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중소도시나 농어촌의 경우 더욱 심각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의 경우 주택 수요에 따른 공급부족으로 내집마련이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국토는 좁고 인구 밀도는 높다보니, 산업화 과정에서 다수를 효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인 아파트가 대중적인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성냥갑 같은 외관에 유사한 형태의 구조를 가진 아파트는 주거공간으로써의 편리함을 극대화했지만, 역설적으로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유한 감성과 수요는 줄어들었다.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편리함에 익숙한 현대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당이 있는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주택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 다만, 건축주로서 집을 짓는다는 것이 굉장한 부담이 되기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특히, 한 때 전원주택 신축에 대한 붐이 위축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몇 해 전 지인이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지인을 만날 때마다 집을 짓다는 게 쉽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건축을 위한 땅은 으레 반듯한 사각형이어야 한다는 통념과는 달리, 지인이 집을 지을 땅의 모양이 특이하여 일반적인 구조의 집을 짓기에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가며 마침내 꿈꾸던 집을 완공했다. 그리고 그 집은 EBS ’ 건축탐구 집’을 통해 소개되었다. 도심에서 접근성 좋으면서도 멋진 풍광을 집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언덕 위에 지나는 사람 열에 아홉은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얀 집, '유로가(家)'다.
여행을 하다가 나는 언제나 알지 못하는 몇몇 집들을 홀린 듯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다. 어떤 집은 그들이 행복하건 불행하건 간에 언제나 일정한 삶의 프로그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래서 어떤 삶에의 초대라고도 할 수 있다. 저 집에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집이란 어느 것에나 어떤 알지 못한 과거와 어떤 빛나는 미래-혹은 그 반대-가 서려 있는 법이다. -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중에서
왜 굳이 그 힘든 집 짓기를 자처했을까? 지인은 외국 출장 중 겪은 경험이 집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출장 중 머물던 호텔 창밖으로 멋진 집들이 보여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너무 비싸서 구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엔 임대주택에 살다가, 은퇴 즈음 전 재산을 털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 집을 판다는 건 결국 자신의 무덤을 남에게 넘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때 지인은 남이 좋아하는 집, 그래서 잘 팔리는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패턴에 맞춰 끝까지 함께 할 집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원래 집이란 그런 것이다. 집은 거주자의 필요와 취향, 그리고 삶의 철학이 담기는 곳이다. 최근 한 전시회에서 집의 본질적인 의미를 마주하게 되었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제25회 이인성미술상 수장자 허윤희의 개인전 <허윤희: 가득찬 빔>이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 <관(棺)집>을 통해 '하루가 인생이라면 아침은 탄생, 밤은 죽음'이라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한 작업을 하였다. 집'과 '관(棺)'을 하나의 구조로 결합해 죽음을 단절이 아닌 삶의 연속선으로 시각화하며, 유한한 생을 자각하고 매일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려는 실존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지금은 집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가 지어놓은 공간을 잠시 빌리거나 구입해 머물다 떠난다. 집에 대한 생각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사는 것, 즉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과거의 집은 달랐다. 부모 세대의 삶과 나의 현재, 그리고 자녀의 미래가 켜켜이 쌓이는 공간이었다. 이와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한 지붕 아래 공존했기에 허윤희 작가의 시선처럼 집은 생과 사는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연속선에 있고, 삶의 공간인 동시에 죽음 이후의 공간이기도 하다. 생과 사, 인간의 희로애락이라는 삶의 무늬가 새겨지는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이다.
나에게 있어 집이란 어떤 곳일까? 내가 태어나고 어렸을 때 자란 공간은 이미 대부분 사라졌다. 내가 태어난 외갓집은 허물어졌고, 부모님을 따라 여기저기 옮긴 집들은 대부분 재개발이란 미명아래 사라진 지 오래다. 결혼해서 마련한 전세도 자가도 좀 더 넓고 편리한 집을 찾아 이사함에 따라 기억이 흐리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10여 년을 살았다. 힘들게 모은 돈과 대출로 마련한 현재의 집에서 아이들이 사춘기를 보냈고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인이 되었다. 가족이기에 겪었던 행복과 상처가 집안 곳곳에 생채기처럼, 혹은 훈장처럼 남아 있다. 여행 등으로 오래 비워둔 집에 돌아왔을 때 낯설지 않은 이유는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덕분이다. 외국생활로 오랜만에 집에 온 아이가 들어서자마자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음~ 우리 집 냄새'
인간에게 집은 단순한 거주지 이상이다. 집에는 희로애락 삶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일종의 기억의 저장소이다. 따라서 집을 단순히 재산의 가치, 즉 재테크의 수단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다.
지인은 자신의 가용한 재산만으로 집을 지은 것은 아니다. 그 속엔 가족이 있었고 또한 미셀 투르니에가 말한 것처럼 '삶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집이 앞으로 품을 시간이 행복일지 불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속에 새겨질 역사는 오롯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몫일 테다. 언덕 위 하얀 집 유로가(家),그곳에 쌓일 지인의 미래가 집과 함께 은은하게 빛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