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나라, 별을 품은 마을

- 광양(光陽) 답사를 다녀와서

by eduist 이길재

꽃향 가득한 봄햇살 아래, 부산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광양으로 향했다.


며칠 전만 해도 앙상했던 가지가 숨겨두었던 꽃망울을 팝콘처럼 터뜨려, 가로변은 벚꽃의 향연이다. 차창 너머 찰나와 같은 봄날의 절정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는 건 늘 따라다니는 징크스와 같은 답사 전날의 술자리탓이다.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오른 버스의 흔들림은 요람이 되고 답사대장 소장님의 말씀은 자장가가 되었다. 늘 아쉬운 순간이다. 이번 답사는 광양제철소 park1538, 광양역사문화관, 옥룡사지 동백숲, 서울대 남부 연습림 관사, 마로 산성, 김 시식지(始殖址), 진월 조선수군지 선소(船所) 기념관, 그리고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까지 하루에 모두 담기엔 벅찬 일정이다. 그만큼 광양이 품은 이야기는 넓고도 깊다.


광양이 철강도시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차가운 느낌이 들지만, 빛 광(光)에 햇볕 양(陽), 광양(光陽) 이름 그대로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한 곳 중 하나로 사계절 내내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이다. 전북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어머니의 품으로 민초의 애환을 달래며 긴 여정을 마치고 남해에 와닿은 이곳은 고대로부터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전에 답사한 금강하구의 군산, 서천 그리고 영산강의 나주와 닮아있다. 하지만 광양에는 이전의 도시와는 다른 보석을 품고 있다.


첫 번째 보석은 광양의 상징인 동백꽃처럼 일편단심으로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지켜낸 ‘정병욱 가옥’이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빛나는 별이 된 시인 윤동주(1917~1945).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사람은 그의 후배 정병욱이었다. 1941년 시인은 자신의 육필 시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후 시인은 광복을 불과 반년을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뒀고, 학병으로 끌려간 아들 정병옥을 대신해서 그의 어머니가 명주보자기에 싸서 항아리 밑바닥에 숨겨둔 시고는 살아남았다. 그 간절함으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고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가슴속 깊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소박한 가옥 내부를 둘러보며 징용으로 살아 돌아올지 모를 아들과 이름 모를 시인의 원고를 목숨을 걸고 지켰을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그 정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 보석 같은 시인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건축물은 화려한 고택도 궁궐도 아니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민족 문화의 자긍심을 품은 성소(聖所)와 같다.


남녘땅 광명은 동백꽃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백꽃의 꽃말이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던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사랑이 '흰 그림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동주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우리는 잊고 있었다. 동주를 세상 밖으로 영원한 별이 되게 한 동백사랑의 정병욱과 그를 사랑한 어머니, 흰 그림자와 같은 두 분이 계셨기에 동주라는 시인도, 별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이 나올 수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모 신문의 인터뷰에서 '정병욱 선생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학자다. 그 모든 것이 윤동주에게 가려져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정병욱

우리는 나로 인해 그림자가 생김을 안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빛나게 하는 흰 그림자(정병욱과 그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잊고 있었다. 가옥 한편에 비치해 놓은 그림엽서를 1년 뒤의 나에게 띄운다. 동백사랑과 흰 그림자가 나를 지켜주고 빛나게 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 윤동주, <흰 그림자> 중에서



두 번째 보석은 광양제철소이다. 이곳에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설립된 것은 우연일까?


철은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철의 왕국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서 융성하였다. 하지만, 역사 기술이 늘 승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그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의 틀에 갇혀 가야는 변방의 작은 나라들로 치부되곤 했다. 비교적 최근에야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가야가 경남을 넘어 전남 동부 지역까지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강력한 교역망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가야가 차지하고 있었던 김해 지역은 예로부터 질 좋은 철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고, 가야는 이를 채굴하고 가공하는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가야는 3~6세기 초까지 화려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가야의 전성기를 뒷받침했던 건 덩이쇠(철정, 鐵錠)였다. 덩이쇠는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은 철 덩어리로, 철기 제품의 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자체로 강력한 경제적 가치(화폐)를 가졌다. 가야는 이를 일본과 중국 등 주변국으로 수출하여 부를 쌓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야(특히 후기의 대가야)는 경남 내륙을 넘어 철기문화를 전파하고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전남의 광양, 순천, 여수, 구례 , 그리고 멀리 남원까지 가야의 문화권을 넓혔다. 특히, 광양은 섬진강 하구에 위치하여 가야의 철이 바다로 나가는 핵심거점이었다.


이를 볼 때, 고대 가야의 철길이 닿았던 광양에 오늘날 세계 최대의 제철소가 세워진 것은 우연을 넘어선 역사의 필연처럼 다가왔다. 과거 가야의 덩이쇠가 구지봉 기슭에서 달구어져 일본과 낙랑으로 뻗어 나가 동아시아의 문명을 깨웠듯, 오늘날 광양의 고로(高爐)에서 뿜어져 나오는 쇳물은 전 세계 자동차와 선박의 철류(鐵流)가 되어 흐르고 있다.

사실 1960년대 생필품조차 부족했던 전후 복구 시기 거대한 제철소를 짓기로 한 결정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무모해 보이는 '국가적 도박'이자 '위대한 결정'이었다. 가야의 철기문화가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듯, 현대의 제철소 건립은 산업의 쌀을 스스로 생산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자본, 기술, 경험이 전혀 없는 3 무의 상태였던 당시 포항제철(현, POSCO) 건립의 종잣돈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정부에서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국제제철차관단(KISA)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당시 세계은행과 국제 사회는 한국과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제철소를 운영하는 것은 시기상조이고 성공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차관제공을 거부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 박태준 사장과 정부에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결과로 일본으로부터 받게 된 대일청구권 자금(대일 민간 및 공공 차관 포함)을 제철소 건립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대일청구권 자금, 그 돈은 일제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대가로 받은 피값이었다. 많은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건립된 국가 기간산업의 뿌리인 제철소는 대한민국이 공업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고 오늘날 선진국 대열로 진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광양제철소가 세워진 매립지가 한때 300여 년 넘게 우리나라 최초로 김양식을 했고 많은 어민들이 생업으로 살아왔던 곳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연의 김을 직접 양식하고 생산함으로써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제철소가 세워짐에 따라 우리나라 제조업과 중공업을 세계적으로 도약하게 될 수 있었다.


광양제철소 park1538 견학을 둘러싼 아름다운 사건이 이번 답사의 백미가 되었다. 답사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사전예약을 잊은 우리에겐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회원의 사위 덕분에 방문 전 사전예약을 할 수 있었고 우리는 광양제철소의 현재 위상과 미래를 공유할 수 있었다. 함께 동행하며 park1538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준 그 사위의 장모 사랑은 동백사랑이다. 뜻밖의 도움으로 마주한 제철소의 풍경은 이번 답사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세 번째 보석은 광양을 사랑하고 문화유산을 지키는 문화해설사이다. 방문지마다 배치된 문화해설사는 잠깐 스쳐 지나갈 뻔한 곳도 한 번 더 돌아보게 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과 함께 한 광양역사문화관(구 광양군청), 서울대 남부 연습림 관사, 진월 조선수군지 선소(船所) 기념관(구 진월면사무소)의 건축물은 모두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이다. 이 건축물은 당시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민초들을 권위적으로 위축시키던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광복 이후 수없이 많은 근대건축물이 일제의 잔재청산 또는 기타의 사유로 허물어지고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건축물이 온전히 남아있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스럽다.


잊히고 사라진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의 기록은 선택적이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도 우리고, 역사를 지우는 것도 우리다.'라는 문화해설사의 말씀이 마음 한편에 깊이 남는다. 부끄럽고 안타깝고 기억하고 싶은 않은 기록과 유산이라도 이를 잘 보존하고 후세의 교훈으로 남기는 여유와 포용의 마음을 지녀야 미래가 있다.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욕심이 후세에 두고두고 유산이 될 소중한 것을 파괴하는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답사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박명의 땅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면 망덕포구의 저녁노을이 더욱 붉다. 긴 겨울이 지나면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는 봄처럼 끊임없이 생산되는 철강 제품들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현대 산업의 새로운 생명력이 된다. 옛날 철로 무장한 가야의 전사들이 멈춘 이곳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듯 역사는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과 버팀목 위에 세워진다. 쇳물을 끓여내던 노동자의 땀방울, 시고를 품었던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지역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 이 오늘의 광양을 만들었듯, 우리의 답사는 늘 그 발자취를 찾고 기억하며 그들과 함께하는 과정이다.

光陽, 빛과 따스함이 가득한 광양의 미래는 여전히 눈부시게 밝다. 동백사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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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시대, <정병욱, 우리나라 국문학 체계 확립한 큰 학자로 우뚝>,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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