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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접구단

언럭키 라이프 라이더

by 박생

와앙―! 고용센터 모퉁이에 외따로 대로를 면한 상담실에 맹렬한 소음이 덮친다. 투명하고 약하고 좁은 방은 만화에 나오는 깡통 우주선 같다. 예전 같으면 개인사무공간에 부러움을 느꼈을 법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도 여기 있어본들 기간젠 걸요―본인은 지나가듯 뱉었을 테지만 세상과 화(和)하고 싶지 않은 나는 그 말을 질리도록 곱씹었다.


더러운 세상. 그녀에게는 성냥갑 같은 상담실을, 나에게는 갖은 면박과 시련을… 진심으로 살아도 늘 하찮은 것을 돌려주는 인생이 싫어 눈을 질끈 감는다. 마침 상담사가 내민 심리검사 결과에 따르면 나는 자살 위험군이다.

구직단념의 개연성을 더해줄 결과에 기다렸다는 듯 주절댄다.

“진짜로 죽고 싶어 자살 위험군이라기보다는 그냥 사는 게 다 부질없게 느껴져요….”

시키면 4절까지도 너끈한데 돌연 말문이 막힌다. 상담사의 눈에 비친 가여움을 본 것이다.

이전 상담 때 직장 고민을 털어놓으니 비슷한 표정이기에 내가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이건 상황 설명이지 측은한 이야기가 아닌데요.”

그녀는 엄마뻘인 데다 하필 모성, 애착 그 비슷한 전공이라 자기도 모르게 측은한 눈을 했나보다고 해명했다. 어른이 한 발 물리니 기세가 등등해진 내가 말한다.

“상담이야 선생님이 전문가시지만, 저는 그래요. 측은할 시간이 어딨어요? 문제 진단하고, 해답 찾고, 그날그날 개선과제 얻어가고… 전 그런 상담이 유익하다고 봐요.”

“여긴 그냥 하소연하러 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털어놓는 시간은 박태근 님에게 의미가 전혀 없나요?”

돌아오는 길, 평온한 오후에 나는 혼자 골똘하다, 삶에 미련이 없다 공언하면서도 매 순간 유익한 것이 없으면 큰일인 것처럼 구는 모순을 생각하느라. 이동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는 생각에 메타적인 문제와 씨름 중인 셈이다.


‘효율적인 시간 사용’은 회사 생활에서 얻은 가장 귀한 교훈이다. 아무리 직장 생활이 별로라 해도 세상의 생리를 안 것은 분명 큰 소득이었다. 서재에 박혀 읽고 쓰며 하루를 보내는 요즘도 나는 규칙적인 생활, 효율적인 시간 안배로 직장인을 흉내 내려 애쓴다.

그러나 효율 면에서 만족스러운 날은 손에 꼽는다. 참고 자료 읽느라 한세월, 적확한 단어 고르느라 또 한세월…, 글쓰기란 원래 효율이 끼어들 자리를 내주지 않는 작업이다.


효율과 담을 쌓은 일에 매진하면서도 효율에 목을 매는 것은, 성격이 급한 주제에 과업을 효율적으로 해내는 것에서 본인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매 순간 성과가 있어야 하는 강박도, 당장 가시적인 것이 없으면 밀려오는 허무감도 모두 거기에서 온다.

그러나 내 삶에서―이토록 심리적 부담이 될 만큼의―드라마틱한 성과를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성과지상주의는 자폐적으로 발생했다. 배냇병신이라는 자격지심이 도전정신을 낳았고, ‘어딘가 특별하다’는 평가가 욕심에 불을 댕겼다―나는 꼭 해 보이리라!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비관은 정상 범주 밖으로의 탈선을 부추겼다. 그 결과 지금 호랑이의 등 위에 올라있는 것이다. (철 들고나니 이 호랑이가 계속 돈 되는 길과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도 보인다…)

죽고 싶다는 말은 사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이 짧은 행간을 읽는데도 긴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탄 호랑이를 길들이는 데에 또 얼마나 오래 걸릴까,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글을 마감하는 오늘도 고용센터 상담을 가는 날이다. 상담사가 ‘호랑이에서 잠시 내려도 좋다’고 하면 나는 또 의뭉스러운 눈을 할 테다. 그 말이 싫어서가 아니라, 구만리 같은 삶이 두려워 고삐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잠깐 듣는 시늉이나 하려고 멈춰서는 정도나 할까.

상담사들은 잠깐 멈춰서는 연습을 반복하면 호랑이에서 내릴 수도 있다고, 그걸 계속하면 ‘자기 자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거라는데… 나는 그 과정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어차피 미래에 알게 될 것 지금 좀 알면 안 되나. 누군가는 이게 바로 삶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길들여가는 과정이라 할 테지. 그러나 아직 와닿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무엇을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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