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쉬는 시간에는 유튜브로 게임 영상을 본다. 장애물을 피해 결승선까지 달리는 게임인데, 영상의 주인공은 고수로 불리는데도 장애물에 닿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일이 왕왕 있다. 그때마다 괜히 댓글창을 본다. 악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남과 게임을 같이 하지 않는다. 비루한 실력 때문에 욕을 들을까 두려운 까닭이다. 아직도 타인에게 게임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면 어린 시절 PC방에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이 새끼 게임 존나 못하네.” 나를 향한 말인지 아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날카로움만은 아직도 선명한.
비단 게임만 그럴까, 나는 여전히 세상만사가 두렵다.
가장 오래된 공포의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식 다음날의 일이다.
그날 선생님은 내게 TV 조작의 임무를 맡겼다. 조회 때는 학교방송을 틀고, 수업 때는 PC 화면으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분명 설명을 경청했는데 집에 오니 조작법이 헷갈려 내내 속앓이를 하다 마침내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엄마가 선생님께 전화를 했고, 임무는 내 손을 떠났다. ‘울 일인가’ 싶지만 새로운 세상이 무섭고, 동화책에 나오는 마녀 같은 선생님(하늘 같은 권위를 누린 마지막 세대쯤 되는 그녀는 살벌한 카리스마로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이 무섭고, 어른의 말이라면 거역할 수 없었던 여덟 살에게는 그만큼 심각한 일이 없었다.
서른이 된 지금도 담의 크기는 비슷하다. 이 녀석이라고 자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다 해내겠다는 용기도 있었고, 나름 강단 있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쪼그라들었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네가 월급만큼의 돈값을 한다고 보느냐, 시킬 일을 찾아서 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줄 아느냐… 직장에서 나는 늘 무능했고, 당차게 부풀린 자아가 터진 자리에는 소심하고 어른(세상)이 무서운 여덟 살 아이만 남아있다.
답답함에 삶의 오답노트를 펼쳐봐도 답은 없다. 내용을 채울 만큼 도전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으니 더욱 두려워지는 악순환 속에 나는 있다.
오늘도 ‘글쓰기의 효능’하면 생각나는 상투적인 문장들을 생각하며 답 없는 마음을 글로 남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아무리 자기최면을 걸어도 마음의 분심(分心)은 끊이지 않는다.
속세로부터 비껴선 채 그곳에서의 실패를 글로 쓰는 일은, 비유하자면 꽉 채워도 모자랄 생의 오답노트를 가지고 ―신에게 올릴―종이꽃[紙花]을 접는 일과 같다. 남이 보기에는 난데없지만, 스스로에게는 수행이자 작은 성취이자 세상을 외면할 핑계가 되는 일. 이 글을 쓰는 내내 그런 마음이었다.
낮에 쓰기 시작한 글을 완성하니 밤이다. 힘겹게 피운 종이꽃을 독서등 앞에 놓으면 얇은 종이의 짜임이 다 보인다. 힘없이 얇고 투명한 꽃은, 잠시 뒤 밀려온 파도에 금세 녹아버린다. 파도는 종이꽃을 보듬는 마음에서 솟은 아주 오래된 슬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