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초음파실에 누워서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유부남 영화감독과 10년 가까이 사랑을 이어오다 최근 아이를 가졌다는 여배우. 그 사람도 초음파로 태아와 처음 만났겠지.
잠시 뒤 마주한 것은 내 쇄골 언저리에 있는 멍울의 사진이었다. 지름 2cm의 구형이니 작지 않다. 의사도 “아주 걱정할 이유는 없는데 아주 안심할 수도 없겠네요” 했다. 괜히 마음이 복잡해져 ‘또 돈이 얼마나 들까?’ 해봐도 물정 모르는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가득 찰 뿐이었다.
나는 병 그 자체보다 돈 까먹으며 자리보존하는 처지가 될까봐 겁이 났다. 지금도 생산성 없이 방구석에 들어앉은 돈귀신인데 혹 하나 더 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두려움이 기분 나쁘게 뇌리를 스쳤다.
연일 매스컴을 달구는 논란의 여배우를 보면서 난데없이 골똘해진다. 저 사람에게 임신이란 어쩌면 애인의 ‘뮤즈’가 되는 마지막 관문이 아닐까. 불륜의 꼬리표를 감내하면, 동서고금 기상천외한 연애사를 자랑했던 예술가의 애인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죽음이 눈앞에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싱숭생숭해져 하등 상관없는 남의 삶에 의미부여를 해보는 것이다.
사회인의 역할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유폐하고서, 여기저기 말썽인 몸으로 버티어 앉아서도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오랜 습관의 발현이다. 스물다섯에 박물관에 들어가면서 “야전 경험이 풍부한 문화부장관”의 첫걸음이라 망상했던 청년이, 스무 살에 학교의 노후한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가 ‘이대로 죽어서 사학 시설물 관리 규정을 강화하는 ‘박생법’의 주인공이 되면 어떨까?’ 생각했던 학생이, ‘덕망’이라는 단어를 처음 안 열다섯에 막연히 “덕망 높은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이 나이만 계란 한 판 찼다고 달라졌을 리 없다. 망상은 사라지기는 커녕 OLED 화질로 반복재생되는 지경이다.
지금이야 ‘불륜 같은 악명도 상관없으니 이름만 알리면 장땡’이라는 몽니에 불과하지만, 이것(?)에게도 ‘입신양명’의 창창함이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아이가 드문 시골서 ‘남달리 총명한’ 아이로 모두의 사랑을 받을 때, 아들의 행보에 무한에 가까운 지지를 보내는 가정에서 주로 그랬다. 하지만 학교를 비롯한 세상에 던져져 타인으로부터 기피되는 되는 등 여러 쓴맛을 보면서 그것은 차츰 독주머니로 변했다. 그것과 붙어있던 자아 역시 세상의 폭력에 맞서는 기사회생을 반복한 끝에 무지막지한 추물이 되고 말았다.
광기의 반복운동은 직장에서도 계속되었다. 병자라는 자격지심은 사람구실의 욕심을 ‘멸사봉공’으로까지 밀어붙였다. 멸사봉공의 아틀라스가 되니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잠 못 이루면서도 실수를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직장이 두려워졌다.
심리상담사는 직장인으로서 나의 패인(敗因)이 “본인의 존재가치를 직장에 걸었던 것”이라고 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가치평가에 전전긍긍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덧붙였다. 나는 깊이 수긍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직장인이 직장에 진심이지 않으면 어디에 전력투구해야하나?’ 의문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머리가 뜨거웠다.
브런치 작가 승인 후 처음 쓰는 글이다. 작가명 박생(朴生)은 아무 자리도 하지 않는 선비를 부르던 옛날 호칭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 역시 백수 처지에 대한 자조인 동시에 이런 처지라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은 자아의 얄궂은 조화라 하겠다.
밥을 먹으려 일어서는데 몸이 무겁다. 자아의 무게다. 나는 분명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 이 녀석은 나의 무엇을 그렇게 악착같이 갉아먹어 덩치를 키우는 건지. 마음만 먹으면 죽음도 퍼포먼스 삼을 것 같은 교활한 자아를 떠멘 채로 누구의 몫인지 모를 끼니를 떼우러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