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접구단

수난2대

by 박생

여러모로 분위기가 나지 않는 연말이지만 엄마는 오랜만에 들떠있다. 새해 있을 임영웅 콘서트 덕이다. 사촌누나가 이모와 함께 보내드리는 것이다. 엄마의 영향으로 같은 직업의길을 된 누나는 엄마를 친엄마처럼 살뜰히 챙긴다. 엄마가 큰 수술로 입원했을 때 곁에서 밤을 샌 사람도 내가 아닌 누나였다.

우리 부모님은 내게 이렇다 할 효도를 기대한 적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평생 병마의 족쇄를 차게 된 아들에게 품은 그들의 바람은 건강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단 둘뿐이었다. 하물며 늦둥이 외동이니 오죽했으랴. 그 덕에 나는 학교 공부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수험서보다는 철학서 따위에 더 큰 재미를 느끼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때 벌써 속세와 융화할 수 없는 싹수를 품고 커온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처음 직장에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난데없이 눈물을 보였다. 내가 평생 밥벌이를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격이라며.

어이가 없었다. 핸디캡을 깨고 돈벌이로써 1인분을 해내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왔는데….

‘해내기’에 대한 집착은 입사 첫날 ‘여기는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요’라는 말을 듣고 더욱 커졌다. 가르쳐줄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터득해서 해보이면 되지, 나는 그렇게 야무진 꿈을 꾸었더랬다.

당시 직장은 원래 유명세가 있었으나 여러 이유로 사세를 줄여 직원이 다섯뿐인 박물관이었는데, 밖에 나가면 ―그 회사의 경영난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들 ‘괜찮은 회사’라며, 일이란 원래 힘든 거라고들 하니 나는 ‘세상 모두가 이렇게 사는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특별전 준비를 위한 허드렛일을 도맡았던 나는 전시가 개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잘렸다. 입사 3개월이 조금 안 된 시점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으니 해고라는 말도 사치였다. ‘망연자실해야 하나’ 어리둥절하던 찰나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갑작스러운 빈 자리에 대표가 불편을 느끼고 있으니 알바생으로 주 2회 나와달라는 전화였다.

처우를 따질 새도 없이 다시 불러준 데에 엷은 황송함을 느낀 나는 알바생 신분으로 1년 정도를 다니고 회사를 그만뒀다. 코로나의 창궐로 회사에 가지도 않는데 수시로 문서수정을 시키는 데서 ‘현타’를 느낄 무렵이었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이 밉다. 신참다운 열정이 열악한 처우 속에 스러졌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착취하는 어른들에게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본인이 미운 것이다. 그러나 나의 눈이 트이면 뭘하나.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세상에서 다시 직장에 가는 일은 두렵기 그지없다.

부모님은 내게 차라리 돈 생각일랑 말고 집에서 글을 쓰라 하신다. 워낙 박봉인 문화계라 타지에서 직장을 다녀본들 남는 것이 없다는 점과, 어느 보살이 나더러 ‘혼자 하는 일을 해야 대성한다’고 했던 말을 이유로 들면서. 물론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간 자식이 겪은 고생을 훤히 보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직장에서의 수많은 부끄러운 순간을 떠올리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유독 부모님이 보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두렵다. 전공 살려 자아실현하겠다고 나부댄 일, 회사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팔다리를 자르던 일, 그럼에도 실패한 결말까지… 죄 부끄러운 날들뿐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부끄러운 장면은 한층 노쇠해진 부모님을 보고도 글을 쓰겠다고 틀어박힌 오늘이려나. 어딜 내놔도 면목 없는 스스로를 구겼다가 애처로워져서 다시 폈다가, 오늘도 너덜너덜한 하루가 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십육만분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