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에서 가장 친한 지안이. 하원 길에 만나면 해님이가 무턱대고 집에 초대하자던 친구였다. 이렇게 각별한 마음을 준 아이는 처음이었는데, 그런 친구에게 그런 모진 말을 듣다니. 가슴이 아렸다.
"그랬구나. 그 얘기 듣고 해님이는 속상했겠다."
아이 마음을 공감해 주려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속상하지 않았어."
"어?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니."라는 대답이 너무 단단하고, 확신에 가득 차 있어서.
"엄마가 해님이었으면 속상했을 것 같은데."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속상하지 않지? 진심은 따로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의심에 마침표를 찍듯 이렇게 말했다.
"속상하지 않게 힘냈어."
그 말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속상하지 않게 힘냈어?"
해님이는 고작 5살이었다. "속상했지만 힘냈어."도 아니고, "속상하지 않게 힘냈어."라니. 누군가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전에 스스로 마음 단속을 할 수 있다니. 어른도 못하는 그 일을 5살은 어떻게 해내는 걸까?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말했다. 해님이의 자기 확신이 놀랍다고. 중심이 단단히 잡힌 아이 같다고. 사랑하고 지지해 주며 잘 키웠기 때문이라는 따뜻한 격려도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잘 키운 덕이 아니라, 아이의 타고난 품성인 것 같았다. 아이라는 어린 존재만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일지도 몰랐다.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경험해 본 적 없고,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만이 누리는 순수한 당당함.
반면, 나는 상처 받았던 순간을 마음속 일기장에 하나하나 적어두는 타입이었다. 어린 시절 좋아하던 친구가 내게만 생일 초대장을 주지 않은 일도, 롤링 페이퍼에 적힌 비아냥거리는 문구도, 짝이 된 아이가 싫다는 듯 힐긋 보던 눈빛도 전부 기억해뒀다가 곱씹고 곱씹는 나였다. 그때마다 나는 속상했다. 힘도 못 냈다. 그냥 속상한 걸로 끝나곤 했다.
깊은 밤, 아이가 그 이야기를 꺼내놓은 건 손톱 거스러미처럼 거슬렸기 때문인 걸 알지만, 그게 속상함인데, 아이는 속상함이 속상함인지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접수하고 싶다.
어떤 말도, 어떤 사람도 자기를 속상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렇게 힘내서 자신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마음이라고. 아이의 마음이란 이렇게 눈부시게 멋질 수 있다고.
나도 속상해지지 않게 힘내고 싶다. 속상해지기 전에 힘내고 싶다. 아직도 늘 상처 받고 흔들리는 어른이라 그 마음의 중심을 함께 붙들고 의지하고 싶다. 아이와 함께라서 엄마인 나도, 좀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