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육아를 쓴 김선미 작가의 강의를 듣는데, 육아는 어려운 것, 힘든 것이 아니라 <귀찮은 것>이라더라. 무선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고, 허공에 대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몸은 아이들의 놀잇감 가운데 있었고, 손은 자동차 하나를 붙들었고, 입은 영혼 없는 "부릉부릉"을 외치고 있었다.
2주간 외출을 하지 못했다. 산책도 못했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았다. 2살과 5살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집에서 아이들과 나는 한데 부대껴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밀접접촉자와 밀접접촉자의 밀접접촉자들은 공동운명체였다.
그나마 외출이 가능한 건 남편이었다. 그라도 사회생활을 해야 하므로 한 덩어리가 된 우리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잠도 거실에서 자라며 베개를 던져 주었다. 평소에도 흔치 않던 육아 교대는 아예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왕따가 도리어 부럽게 느껴지는, 그야말로 순수한 의미의 ‘독박 육아’였다. 남편의 도움도, 조부모의 도움도, 어린이집의 도움도 받지 않은 독박 육아.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아니, 자가격리 해제 직전엔 약간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자가격리 앱으로 매일 보고를 할 때마다, 정신적 문제가 있을 때 누르는 상담 요청 버튼에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격리 기간이 더 길었다면 기어이 눌렀을 것 같다.)
아침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살포시 눈을 뜬 아이에게 모닝 뽀뽀를 선사하고 “잘 잤어? 우리 이쁜 아가들!”이라고 다정한 한 마디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커피 카페인의 효력은 오전까지였지만, 점심을 먹이고, 둘째를 재우고, 첫째와 단둘이 ‘수업’이라고 부르는 활동 때까지 버틸 만은 했다. 선 긋기와 스티커 책을 한 장씩 하고, 컴퓨터로 게임 한 판 하고, 종이 공작 하나 할 때까지도. 둘째의 방해 없이 엄마와 독점한 아이, '수업'이 좋다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둘째가 깨면, 육아 후반전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체력의 한계가 왔다. 저녁을 먹일 때는 넋이 반쯤 나갔다. 그리고 꼭 그때 사달이 났다. 첫째는 밥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식을 먹일 때부터 부리던 까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밥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친절하게 꼬셔야 했다. 하지만 친절함도 한계가 있었고, 신경이 곤두선 엄마는 결국 성질을 내고 말았다.
"야! ₩%#&*%₩:::^&!!!!!"
입에선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폭격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졌다. 욱하지 말라고 오은영 선생님이 그토록 말씀하셨건만. 낯 뜨거워 차마 옮기지도 못할 무자비한 언사에 아이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눈은 붉어졌다. 아이는 내 말의 부당함을 알았다. 아니, 자기의 잘못보다 훈계의 강도가 지나치게 크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야멸찬 말을 내뱉었다.
“나 이제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엄마랑 안 놀 거야. 달님이랑만 놀 거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신은 돌아온다는 거였다. 정신줄이 해님달님을 구출할 동아줄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체면 차릴 것도 없었다. 정신줄이 보이면 얼른 붙잡아야 했다. 나는 투항했다. “미안해. 해님이가 엄마 사랑하지 않아도 엄마는 해님이 사랑해.”
엎질러진 물을 다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접시에 주워섬긴 옹색한 마음 몇 방울도 고맙게 받았다. “나도 엄마 사랑해.” 하며 내 품에 안겨오는 아이를 볼 때마다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상황 종료. 그리고 간신히 그날 하루도 종료.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까, 아이도 저녁때는 엄마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어느 날은 엄마의 상태에 대한 아주 객관적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아침으로 돌아가야겠다.”
“응?”
“아침으로 돌아가야겠다. 저녁엔 힘드니까.”
아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아침과 저녁의 컨디션 차이가 크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속된 말로, 저녁만 되면 엄마가 미친 X이 되는 걸 참고 있었던 거지.
결국, 나는 무릎 꿇는 심정으로 아이에게 고백했다. 하루 종일, 해님이 달님이랑 놀아주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엄마는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이라고.(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땡벌"이라는 후렴구를 해준다.)
그러자 아이는 대안을 하나 제시해 줬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엄마는 달님이랑만 놀고, 아빠는 나랑 노는 거야.”
얼핏 들으면, 아이는 엄마에게 놀아주기 노동을 면제해 주는 아량을 베푼 것 같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관계가 달랐다. 그냥 해님이는 어제 아빠가 사 온 VR 게임기가 너무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죽상이 되어서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아이가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엄마, 설거지하기 힘들어?”
“응. 힘들어.”
“힘들면 쉬어야지.”
응? 5살이 이렇게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알다니, 새삼스러워 아이 얼굴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또한 이면에 숨겨진 본심은 내 기대완 달랐다.
“침대에 앉아서, 책 읽으면서 쉬어야지.”
결국, 자기 책을 읽어달라는 뜻. 자기 심심하니까 설거지는 그만하라는 뜻. 야, 10시, 11시까지 책 읽어주는 것도 노동이거든?!! 앙큼한 기지배.
엄마의 몸은 공공재인가 보다. 아이들은 이를 마음껏 이용하고 향유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의 권리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 소비되는 제 몸을 아까워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힘들다. 솔직히 힘들다.
그래도 감동과 실소를 뱉으며 육아의 현장을 버틴다. 육아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일. 그 목욕탕에 몸이 퉁퉁 불어난 채로 기약 없이 잠겨있을지라도, 언제쯤 나가서 햇빛 아래에 산뜻하게 몸을 말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찬물, 뜨거운 물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의 피부도 탱글탱글 탄력 있어지리라 믿으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