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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2. 2019

승부라는 것을 배우다-2. 지는 방법 가르치기



지는 방법 가르치기


 지적장애가 있는 M군, S양, E양이 가위바위보를 섭렵하는 동안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가위바위보를 못 하는 아이가 있었다. 가위바위보의 규칙을 이미 알고 있는 아이, 지능이 가장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이,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함부로 시키지 못하는 아이, 바로 C군이었다. C군은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33.3%의 확률로 화를 냈다. 가위바위보는 33.3%의 확률로 지기 때문다. 어쩌다 가위바위보를 시켰을 때 C군이 이기면 다행스러워서 다른 학생들 몰래 “휴우”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C군은 지는 것에 대한 적응력이 전혀 없었다. 통합학급에서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은 C군이 사고 치는 날이었다. C군은 승부가 결정되는 가위바위보, 주사위 게임, 보드 게임, 놀이 활동, 체육 활동 등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켰다. 활동이 재미있으면 재미있을수록 그는 흥분 상태에서 지나친 의욕을 부렸고, 그러다 결과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있는 힘껏 울분을 표출했다. 그렇게 교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저는 총상을 입은 병사처럼 지쳐서 우리 교실에 찾아왔다. 물론, C군보다 더 심각한 총상을 입은 건 통합학급 교사였다. C군 비위 맞추랴, C군의 폭격을 맞은 서른 명 가까이 되는 나머지 아이들 비위 맞추랴 통합학급 선생님은 늘 녹초가 되었다.


 특수학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펄펄 날뛰면서 화를 냈고, 그 불같은 감정은 이후의 수업 활동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다. 가위바위보와 같은 승부가 필요한 활동을 완전히 배제한다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C군에게는 발표를 하거나, 퀴즈의 정답을 맞히는 것조차도 하나의 승부였기 때문이었다. 손을 든 여러 학생 중에서 내가 C군을 먼저 지목하지 않으면 그는 여지없이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을 다. 괴성을 지르거나 옆에 있는 친구에게 화풀이하기 시작하면, 수업은 그대로 마비되었다.

 이 문제는 한동안 나의 골칫거리였다. 학생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야 하는 상황은 수업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했다. 그렇다고 계속 C군만 지목하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손을 든 학생에게 대답을 요구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기로 했다. 대답 기회를 얻기 위한 학생 간의 경쟁아예 제거하기로 한 것다.


 나는 우선 순번을 정했다. 그리고 모든 질문 상황에 적용했다. K군과 C군이 함께 공부하는 경우, C군에게 질문을 한 번 하고, K군에게 질문을 한 번 한 뒤, 그다음에는 다시 C군을 질문했다.

 “이 문제는 C군이 풀 거야. 흥부의 형 이름이 뭐였지?”
 “놀부요.”
 “다음은 K군이 대답할 거야. 흥부는 어떤 새를 보았지?”
 “제비요.”

 기다리면 자기 순서가 돌아온다는 것을 안 C군은 그제야 얌전해졌다. 왜 자신을 먼저 시키지 않았냐고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는 것마저 교대로 하게 해주니 나는 C군에게 세상에 없을 공정한 선생님이 되었다.

 승부에 취약한 C군과 달리 단짝인 K군은 승부가 있는 놀이를 참 좋아했다. 그는 늘 경쟁심과 승부욕을 불태우며 C군을 이기려 했다. K군은 학습장애였다. 2학년인데 한글을 떼지 못했다. K군은 자보다 공부를 잘하는 C군에 대하여 열등감이 있었고 공부 면에서 뒤처진 자신의 위상을 승부를 통해 되찾고 싶어 했다. 갈등은 예정된 것이었다.
     
 C군이 특수학급 교실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레고와 같은 블록이었다. 당시 나는 다양한 종류의 블록을 구비해뒀었다. 상상력이 뛰어난 C군은 블록을 용한 경찰 놀, 전쟁 놀, 외계인 놀를 좋아했고, 영화나 만화에서 들었음 직한 그럴듯한 대사를 하며 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역할놀는 경쟁성이  없어서 비위만 맞춰주면 큰 문제 없이 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K군은 역할 놀이에 싫증을 냈다. 더군다나 자기 위주로 야기를 진행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C군을 상대해주기란 쉽지 않았다. K군은 또래 2학년 남자아들처럼 승부가 있는 씩씩하고 짜릿한 놀를 좋아했다. K군은 도전장을 내밀 듯 C군에게 늘 승부가 있는 게임을 들이밀었고 블록 놀이나 역할 놀이를 제안하는 선생님을 무색하게 했다.

 하지만 가위바위보조차 하지 못하는 C군은 모든 게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주사위를 용한 말판 게임을 시키면 자기 말이 늦다고 화를 냈고, 개구리를 점프시켜 나무 위에 올리는 게임을 하면 자기 개구리는 전부 바닥으로 떨어진다고 화를 냈다. 볼링 게임을 하면 볼링핀이 다 쓰러지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게임 특성상 필연적인 상황도 C군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요행히 기면 득이양양 해하고 게임에서 진 K군을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대개 K군이 참아줬지만, 참아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쉬는 시간은 금방라도 시한폭탄이 터질 듯 항상 아슬아슬했다.

 한 번은 윷놀이를 했다. 윷놀 말판을 잘 놓을 수 있도록 선생님이 공평하게 도움만 주 승부가 운으로 결정되는 놀이였다. 하지만 결과는 얄궂게도 C군의 참패였다.

“윷놀이  개사기네! 완전 개사기네!”

 여지없이 C군의 욕설이 쏟아졌다. 진 것이 분해서 C군의 눈은 붉을대로 붉었다.

“욕하지 마!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야. ”
“왜 K군은 윷놀이를 잘하냐고요. ”
“윷놀이를 잘하는 게 아니야.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
“K군은 왜 운이 좋냐고요! 진짜 야비하다. ”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러운 C군이었다. 나는 타르듯 이렇게 말했다.

“운이 좋은 건 K군 탓이 아니야. ”

옆에서 듣고 있던 K군도 억울했던지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내 탓이 아니야!”

제 할 말이  없어졌을 것 같던 C군이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K군 탓이야. K군 뒤에는 하나님이 있어. ”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K군에게는하나님라는 든든한 빽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C군의 생각은 언제나 예상 밖었다.

 C군과 K군이 부딪힐 때가 많았지만 나는 되도록 둘이 노는 것을 내버려 두려고 노력했다. 지켜보고 있다가 새로운 장난감나 게임을 꺼내면 사용 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기만 했다.  방법에 대한 의견 충돌은 다툼의 소지가 되기 때문었다. 그리고 놀하는 중간중간에

“어려운 게임이야. 질 수도 있어. 그래도 화내지 말아야 해. ”
“져도 괜찮아. 다음에 이길 수 있어. ”

라는 말을 해줘야 했다. 교사의 말 C군의 머릿속에 들어가 행동을 조절하는 내적 언어가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가끔은 따라 말하게 시키기도 했다.

“따라 해봐. 져도 괜찮아. ”
“져도 괜찮아. ”
“못해도 괜찮아. ”
“못해도 괜찮아. ”

 렇게 C군 화를 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게임이 끝난 후의 조치도 중요했다. 만약 게임에서 C군이 기면, 이겼다고 잘난 척하는 C군이 들으라는 듯 K군을 칭찬했다.

“와, K군은 졌는데도 화내지도 않고 의젓하네. 정말 어른스러워!”

 반대로 K군이 겼을 때 C군이 화내지 않고 잠잠하면

“C군아, 정말 대단해! 화도 안 내고 정말 잘 참는구나!”

라고 과장되게 칭찬했다. 원칙은 절대 게임에서 긴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게임에서 긴 사람은 게임에서 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기 때문었다.

 C군의 변화는 아주 천천히 루어졌다. 언제부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마치 S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주먹이 아닌 다른 모양을 내기 시작한 것처럼,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언젠가부터 C군은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짜증 섞인 한마디 말만 내뱉을 뿐, 울분을 오래 간직하지 않고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수업 시간에 승부가 필요한 게임을 슬며시 디밀어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교실에 네트를 치고 풍선 배구나 풍선 배드민턴을 시키면 깔깔거리며 좋아할 뿐 자기 점수가 낮아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기는 기쁨보다 놀이를 함께 하는 것 자체의 쁨을 천천히 알아가고 있었다.


 하루는 보드게임의 한 종류인 블로커스 게임을 했다. 모양 조각을 같은 색깔끼리 연결해서 사각 판을 채우는 게임인데, 가지고 있는 모양 조각을 다 소진한 쪽이 다. C군과 K군은 공간지각력이 좋아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었다. 교사인 나도 참전하여 C군은 초록색 조각, K군 빨간색 조각, 나는 노란색 조각을 게임판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여러 번 게임을 해서 그런지 아들은 능숙했다. 교사인 나도 봐주지 않았다. 자기 영역을 선점하며 적을 방어하기도 하고, 적의 영역에 침투하여 땅을 빼앗기도 했다. 아와 함께 하는 게임치고는 꽤 박진감 있게 진행되어 K군, C군도 재미있어하고 나도 흥미진진했다. 게임 결과 K군이 1등, 내가 2등, C군이 3등으로 꼴찌였다. 난감다. 어쩌지? 나는 C군이 화를 낼까 걱정되었다. 열심히 게임에 참여했던 터라 기고픈 욕심이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C군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그리고 비장한 느낌의 낮은 목소리로 렇게 말했다.

“좋은 승부였다. ”

 어느 만화에서 들어봄 직한 대사, 마치 한 무림 고수가 치열한 결투를 끝내고 멋있게 내뱉을 것 같은 말이었다. C군은 어디서 그 말을 듣고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싸움에 졌지만 비굴해지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C군 이제 정말 많이 컸구나. 그제야 안심이 됐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던가. "좋은 승부였다."는 말은 승부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지는 법을 배운다는 건 지고도 멋있는 법을 배우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명승부의 짜릿함을 알게 되면 지는 것도 꼭 나쁜 게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경험한 모든 승부가 또 다른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난이도 상'의 세상도 두려워 않고 당당히 세상에 뛰어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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