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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an 12. 2019

승부라는 것을 배우다-1. 가위바위보 가르치기


 이 엄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승부를 피할 순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모양새라도 승부를 겨루는 과정은 포함되게 마련이다.


 승부는 숙명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양산한다. 퀴즈를 내면 대답하는 자는 승자가 되고, 대답을 못하는 자는 패자가 된다. 게임을 하면 순발력 있는 자는 승자가 되고, 행동이 느린 자는 패자가 된다. 운동 경기를 하면 체력이 좋은 자는 승자가 되고, 체력이 나쁜 자는 패자가 된다. 승자와 패자를 엄격하게 나누어 비교하거나 차별적으로 보상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경험한다. 친구가 나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른다거나, 친구가 나보다 더 깔끔하게 종이를 접는다는 지의 사소한 일로도 아이들은 패배감을 느낀다. 그래서 승패를 안다는 것, 그리고 승패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특수학급 아이들은 이걸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하니 교사가 일부러라도 가르쳐야 한다.  

     



가위바위보 가르치기


 지적장애가 있는 M군과 S양은 1학년 때 가위바위보를 제대로 못 했다. "가위바위보"를 외친 후 가위바위보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앞으로 내밀 줄은 알았지만, 계속 같은 모양만 냈다. 눈치가 빠르고 꾀 많은 친구와 붙는 날엔 10전 10패로 져서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 뻔했다. 나는 가위바위보를 꾸준히 가르치려고, 가위바위보를 하루의 일과 중 하나로 끼워 넣었다. 매일 아침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에게 오늘의 날짜(월, 일, 요일) 카드를 붙일 수 있는 특권을 주기로 다.


 가위바위보를 가르칠 때 중요한 사항은 '정지'였다. 다 같이 힘차게 "가위바위보"를 외친 후 손을 앞으로 내고 나서 나는 다급히 "정지!"를 외쳤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들의 손은 빚다 만 점토처럼 뭉그러져서, 가위인지 주먹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가 되었다. 모두 잠깐 정지화면처럼 멈춰 있 줘야, 느리게 배우는 학생들이 그들만의 속도로 승패를 천천히 헤아릴 수 있었다.

"가만 있어 봐. 누가 이겼지?"

제대로 대답을 할 때도 있었지만 틀린 대답을 할 때도 있었다. 틀릴 때는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하곤 했다.

"(왼손 주먹을 오른손 보자기로 감싸며) 보자기는 주먹을 감싸버려."
"(휴지를 가위로 자르며) 가위는 보자기를 잘라버려"
"(네모난 연필깎이를 가위로 자르는 흉내를 내며) 주먹은 가위로 자를 수 없어. 아이구 안 잘라지네. 주먹 진짜 힘세다!"

설명이 끝난 후 다시 질문했다.

"보자기는 주먹을 이겨. 그럼 누가 이긴 거니?
"M군이요."
"그럼 M군이 나와서 오늘의 날짜를 붙이도록 하자."


 가위바위보 연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벌써 M군은 가위바위보의 모양을 바꾸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S양은 여전히 주먹만 내고 있었고, M군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확연히 높아졌다. 나는 우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S양이 주먹을 많이 내면 낼수록 M군은 주먹을 이길 수 있는 경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고, S양 자신은 주먹이 지는 경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다. S양의 주먹 쥔 손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어쩌지? 보자기가 S양 주먹을 먹어버렸다!"라고 외치는 숱한 날들이 흘러갔다.


 승리는 매번 M군의 몫이었고, S양은 매번 아쉬워했다. 아쉬워하는 건 매우 좋은 징조였다. 승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한 것이니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였을까. S양은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이기기 위해 무슨 방법이라도 써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마음의 움직임은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주먹 말고 가위, 보자기도 내기 시작했다. S양이 주먹이 아닌 다른 모양을 내면서 가위바위보의 모든 경우의 수가 등장했고, M군과 S양은 모든 경우의 수를 이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 년의 연습 끝에 그들은 1대 1 가위바위보를 전부 숙달하게 되었다. 그렇게 M군과 S양은 가위바위보를 할 줄 아는 2학년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매일매일 가위바위보 연습을 하진 않았다. 공부 시간에 순번을 정하거나, 쉬는 시간에 보드게임이나 신체 놀이를 할 때만 가위바위보를 했다. 대신, 한 단계 높은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1학년 신입생으로 들어온 E양과 함께 3인 가위바위보를 시작한 것이다.


 3인 가위바위보는 훨씬 까다로웠다. 같은 모양이 나올 때만 비기는 줄 알았던 아이들이 가위바위보 세 가지 모양이 동시에 나와도 비기는 것임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한참 들여다봐도 비긴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해, 정지된 세 개의 손을 꼼짝도 못 한 채 선생님 눈치만 살피곤 했다.

"어? 가위바위보가 전부 나왔네. 누가 이긴 것도 아니고 누가 진 것도 아니네. 어떻게 된 거지?"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면 남은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답을 그냥 알려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눈치 빠른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비긴 거요!"




 특수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가위바위보의 세 가지 모양이 한꺼번에 나와서 비기는 경우가 이렇게 가르치기 어려운 것인지 몰랐을 것이다.

3인 가위바위보는 승패를 판단하는 것도 어려웠다. 3인 가위바위보의 승부는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이기는 상황과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이기는 상황,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최종 1위, 2위, 3위를 파악해야 했다. 꽤 복합적인 사고력을 필요로 했다.

"누가 이겼니?"
"M군과 E양이요."
"그럼 누가 또 가위바위보를 해야 할까?"
"M군과 E양이요."

 그래서 M군과 E양이 다시 가위바위보를 할 때의 중요한 사항은 반드시 S양의 손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위바위보!"라는 힘찬 구령 소리를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손이 나가기 때문에 S양은 참여하지 않도록 물리적으 통제해야 다. S양이 끼어드는 날엔 손이 세 개가 되어 아이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고, 승패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제 M군과 E양이 1, 2위를 결정짓는 가위바위보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누가 이겼는지 알려주지 않고 질문했다. 승패를 결정짓는 권한을 아이들에게 점차 넘겨주면, 아이들은 자기가 한 승부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이겼니?"
"M군이요."
"그럼 누가 일등이니?"
"M군"
"이등은?"
"E양"


 1등과 2등이 교통정리가 되면, 상황은 쉬워진다. 호명되지 않고 남아있는 학생은 자기가 삼등이라는 것을 금방 인식한다.

"삼등은?"
"S양"

 그렇게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또 일 년간 연습했다. 선생님의 매번 유도 질문을 해야 했지만 아이들은 점차 가위바위보의 룰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해가 다 가기 전에 그들은 결국 3인 가위바위보에서 승패를 확인하고 순번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지적장애 학생에겐 어렵고 까다로운 과제지만 참을성과 의욕만 있다면 끝내는 가위바위보를 배울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승부를 배우기 위해 가위바위보만큼 많이 사용하는 건 주사위 게임이다. 주사위에 나온 숫자만큼 장난감을 모아서 더 많이 모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한다거나, 말판을 준비해서 더 빨리 도착지에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한다. 아주 간단하게는 그냥 한 번 던져서 누가 더 큰 수가 나오는지 겨뤄보는 경우도 있다. 교실에서 가위바위보나 주사위 게임처럼 승부가 빨리 결정되는 게임을 활용하는 건 꽤 효과적이다.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서 실시하면 실시할수록 좋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게임에서 이길 기회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위바위보나 주사위 게임은 우연 외의 다른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그런 게임이 . 가위바위보나 주사위 게임처럼 누구나 승리자가 될 기회를 주는 게임이. 반복적으로 실시하면 아이들이 성공과 실패의 평균치를 가져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항상 이기는 사람이 없고 항상 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다. 그리고 승부라는 것이 늘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다.


 특수학급 아이들은 어딜 가나 지는 경험을 많이 한다. 당연하다. 낮은 지적 능력, 부족한 사회성, 무력한 신체기능 등 때문에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누락되거나 무시당하기 일쑤다. 아이들은 세상은 안되는 것이 참 많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낮은 자존감과 패배 의식을 가진 아이를 만나면 교사인 나도 무력감에 빠진다. 나를 만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다. 내가 있다고 아이가 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내가 있어도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넘어져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일뿐이다.

 실패도 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실패하는 자리엔 아주 푹신한 쿠션이나 매트를 깔아놓아야 한다. 다치지 않고, 상처 입지 않도록 안전하게 실패를 연습시켜야 한다. 성공도 해보아야 한다. 실패의 기억을 잊을만큼 충분한 횟수로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한 번 실패해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학교에선 그렇게 해야 한다. 학교가 아무리 무시무시한 곳이라도, 사회에 비하면 ‘난이도 하’의 사회 적응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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