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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Jun 30. 2019

엄마 장난감의 입장에서 토이 스토리 4를 보다.

쓰레기는 장난감으로, 장난감은 쓰레기로,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토이 스토리 4>를 보고 나니, <비포 미드나잇>이 떠올랐다.



분위기와 성격이 전혀 다른 영화인데 왜 그랬을까. 공통점이라면, <토이 스토리 4>가 1, 2, 3편을 잇는 시리즈의 후속작이고, <비포 미드나잇>이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을 잇는 비포 시리즈의 후속작이라는 것. 또 다른 공통점은 현재 나온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게 전부다.



게다가 <토이 스토리>는 애니메이션이다. 에단 호크, 줄리 델피처럼 배우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다. 게다가 주인공인 우디, 버즈 등은 흡혈귀처럼 늙지 않는 장난감이라, 애니메이터들은 그들의 얼굴에 한 줄의 주름도 그려 넣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나에게 자꾸 나이 듦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가 나이 듦을 말한다는 건,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됐다는 것,

즉,

이것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일 것 같다는 생각.



                                                              





<토이 스토리 4>는 우디의 주인인 앤디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제 노숙한 장난감이 된 우디의 이야기이다. 화려한 날은 지나가고, 그는 이제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해 옷장에 처박힌 신세가 되었다. 갖은 노력으로 다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는 줄거리로 전개되었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그런 소망조차 얄궂게 느껴질 만큼 상황은 변했고, 세월은 흘렀다.



시작은 역시 남루했다. 난관은 많았지만 지금까진 주인공이었는데, 우디는 이제 포키라는 새 장난감 뒤치다꺼리나 하는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뒤치다꺼리할 새 장난감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조차 모호해졌다. 우디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이인자, 뒷방 마님 같은 별명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우디를 응원하는 나 같은 골수팬의 공통적인 마음일 거였다.



<토이 스토리 4>는 <비포 미드나잇>과 마찬가지로 모두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보낸 뒤 지속되는 삶에 대해 보여준다. 청춘이 지나고 찾아오는 시간은, 지금도 여전히 찬란하다고, 청춘의 찬란함과 다른 의미의 찬란함이라고 항변하고 나서야 비로소 찬란해진다. 지난날에 대한 향수에만 젖어 살면 안 될 것 같아 갖은 노력을 해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만큼 새롭거나 반짝반짝해지지 않는 시간, 어떤 의미에서는 구질구질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처연해지는 시간이다. 토이 스토리를 보며 자란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하나둘씩 이런 정서에 공감하기 시작할 것이다. 슬프지만, 늙고 있다는 증거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경고했다. 좋았던 시간은 항상 짧게 끝난다고.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박물관에 영원히 남는 것보다 주인 곁에 잠깐이라도 남는 것을 택한 우디의 모습을 보여줬다. (토이 스토리 2) 그리고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도 보여줬다. (토이 스토리 3) 아마 그 이후의 이야기를 대비하라는 예행연습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든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은데, 그런데도 삶을 지속된다는 것. 더는 삶에 영화 같은 스토리가 펼쳐지지 않아도, 계속 이 지루한 삶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 <토이 스토리 4>가 제작된다고 했을 때부터 많은 이들이 사서 걱정했던 부분도 결국 이거였지 않은가?


                                                    

"무슨 이야기가 더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이야기는 있었다.



<토이 스토리 4>가 제작됐다는 건, 아직 우리에게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희망을 상징했다. 그건 모든 사명을 끝내고 난 후에도 익명의 존재로 속수무책 사라지진 않을 거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실망스러웠던 것은, 우디가 좀 구닥다리처럼 굴 때였다. 우디는 '꼰대' 같고, 포키는 '취업 준비생' 같다는 한 리뷰어의 시각도 매우 신선하고 일리가 있어 보였다. http://m.blog.naver.com/whswls48/221568331345 원래 포키는 본인을 '쓰레기'라고 여겨 쉴 새  없이 쓰레기통으로 다이빙하는, 생기 있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우디의 교육을 받고 난 후에 세뇌라도 당한 듯, 그는 처음부터 타고난 장난감인 것처럼, 제2의 우디인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쓰레기임을 알고 있는 장난감'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흔한 장난감이 된 것 같아 아쉬웠다.  



게다가 포키는 탈출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저 기성세대인 선배 장난감들의 구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인상이었다. 그건 포키가 스스로 성장하고 깨달을 여지를 주지 않아서 생긴, 어쩔 수 없는 수동성이었다. 자신을 '포근한 쓰레기'라 했던 천진한 발상을 잃지 않았다면, 그는 훨씬 입체적인 캐릭터로 남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탈출 작전에서 포키가 쓰레기통으로 돌진하는 습관을 이용했다면, 자신을 버리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역설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됐을 것이다.



물론, 주인에게 사랑받는 장난감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주인에게 필요한 장난감을 육성(?)하자는 우디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귀가 나온다.


                                                        

행할 줄 아는 자들은 행하고, 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가르치고, 가르치지 못하는 자들은 자르치는 자들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자들을 가르치지 못하는 자들은 정치를 한다.

                                           

나이가 들면 가르치는 자리, 또는 가르치는 자를 가르치는 자리로 진입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남보다 마치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행할 능력이 없어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정한 겸손함은 남에게 영향을 받아 자기를 기꺼이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포키가 쓰레기에서 장난감으로 정체성을 바꾸는 동안, 우디도 포키에게서 작은 영향이라도 받기 바랐던 것 같다. 우디 자신은 현재 장난감이지만, 언젠가 포키 같은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으면 좋았겠다. 사실 쓰레기라는 정체성은 가볍고, 명랑하고, 자유롭고, 가능성이 무한한 색깔로 덧입을 수 있는, 아주 쓸모 있는(?) 것이다. 쓰레기는 장난감이 될 수 있고, 장난감도 쓰레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쓰레기는 장난감이 된 순간 장난감만 할 수 있지만, 장난감은 쓰레기가 된 순간 뭐든지 할 수 있다. 멋지지 않은가!



사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우디의 선택도 자진해서 주인 없는 '쓰레기'가 되겠다는 거였다. 그런데도 그 선택이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우디의 내적 변화 과정이 자세하게 그려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장난감이 쓰레기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쓰레기가 장난감이 된 순간만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고백(그런 맥락의 고백)을 우디의 입에서 듣고 싶었다. 영화는 우디가 유연하고 가변적인 캐릭터로 말랑말랑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줬으면 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말이다.






                                                               


사실 쓸모 없어질 운명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야말로 부모이자 교사로, 영화 속 장난감들처럼 아이의 필요를 알아내어 곁에서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어른의 쓸모란 시한이 정해져 있다는 걸 절절히 안다. 아이들이 애착 인형을 끌어안고 자다가, 인형 없이 혼자 잠들 수 있게 됐을 때 그 인형을 내팽개쳐 버리듯, 어른도 내팽개쳐질 수 있다.



물론, 부모는 교사와 다른 차원이다. 한두 해 곁에 머물다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아이 곁에서 아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니까. 하지만 언젠가 아이가 엄마를 간절히 찾는 날들은 점차 줄어들고, 엄마 아닌 다른 타인의 중요도는 더 커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나는 우디처럼 그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아이가 나를 찾을 때까지 잠자코 물러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순간은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인공호흡기라도 꽂아서 그 생명을 연장하거나, 박제라도 시켜서 그 형체를 유지할 순 없으니, 그저 필사적으로 기록할 뿐이다. 감동을 혼자 간직하는 게 낭비라는, 입증되지 않은 사명감으로 써나간다. 사람들자서전을 쓰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자서전이라도, 그걸 쓰고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인생이 아주 사라지지 않을 거란 위안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삶을 모두 기록했다고 해서, 그 삶을 읽는 모두가 자기 이야기처럼 살기 바라서는 안된다. 남의 삶을 읽는 이유는 그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어떤 부분이 자신과 비슷하고, 어떤 부분은 자신과 다른지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제 삶에 더 다가가기 위함이다. 이건 사실 내게 고마운 깨달음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내 삶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결함 있는 인생이라고,

더 쉽게 휘발되는 게 아니라는 것,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깊고 진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것.



내가 <토이 스토리 4> 등장인물개비개비를 보며 악당의 대표 격인데도 가련해하고, 결국 그녀 때문에 울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요한, 씨돌, 용현>이라는 다큐멘터리 한 토막을 봤다. 전편을 다 보진 못했지만, 그 내용이 흥미로워 전부 찾아 읽었다.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민주화 투쟁, 재난 현장에 달려가고, '씨돌'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속에서 괴짜로 살아가고, 이제 '용현'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한 사람. 그는 타인을 위해 헌신을 다한 의인이지만, 자기 이름은 어디에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 결국 주인공이 된 이야기는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는 언젠가 퍼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세상에 작은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이름은 자기도 모르는 누군가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이야기의 형태로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는 보 핍의 양들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름이 물을 것이다.  빌리, 고트, 그루트라는 이름을 다시는 잊지 않으려고 되뇌듯이, 누군가는 요한, 씨돌, 용현이라는 이름을 되뇌었을 것이다. 쓰레기이든 장난감이든 자기 정체성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 몸이 제 부피만큼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제 이름을 갖고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아이의 장난감이 되든, 한 장난감의 연인이 되든, 수많은 아이에게 장난감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든, 상관없다. 어딘가에서 생각지 못한 우디의 소식이 들려오면 그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든 무척 반가울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런 반가운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



새벽이다. 설핏 깼는데 옆에 천사처럼 한 아기가 잠들어 있다. 내 발바닥에는 아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내 곁에 있지만 아기는 언젠가 밤새 엄마 몸을 치대지 않아도 잠이 잘 수 있을 것이고, 새벽녘에 설핏 잠이 깨어 옆에 엄마가 없다는 걸 알게 되어도 울지 않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혼자 잘 제 방을 요구할 것이고, 그 후에는 방문을 자주 열지 말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러 올 것이다. 덕분에 나는 길고 편하게 자겠지만, 지문처럼 발바닥에 남을 아기의 이름을 보며 그에게 전부를 내주었던 숱한 밤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떠나갈 날 얼마나 후회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기의 장난감이 되어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 이야기는 결국 계속될 것이고, 그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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