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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이 Aug 24. 2019

제목밖에 없는 책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어릴 때 취미는 책장에 꽂힌 전집 제목을 읽는 거였다.



부모님은 전집을 많이 사주셨는데, 그중에는 세계문학 전집처럼 어려워서 수준에 맞지 않는 책도 있었다. 긴 소설도, 연작 소설도 한 권에 눌러 담은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이었다. 제목만 다를 뿐 표지 디자인은 죄다 똑같았고, <어린 왕자>를 제외하곤 삽화도 없었다. 얇디얇은 종이를 가득 메운 깨알 같은 활자를 다 읽을 깜냥이 안 되니, 제목과 작가 이름을 읽으며 내용을 상상할 따름이었다.



때론 'E. 브론테'와 'C. 브론테'라는 이름에는 똑같은 '브론테'가 있을까?', '생텍쥐페리의 책에는 왜 비행기와 관련된 말이 많을까?'와 같은 의문을 품었다. 'E. 브론테'와 'C. 브론테'는 자매지간이고, 생텍쥐페리는 조종사 출신이라는 걸 알아냈을 땐, 대단한 발견을 한 양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들의 독특한 사연을 알게 될 때마다 소설의 내용보단 작가의 삶을 상상하는 게 더 즐거웠다. 소설가 자매가 차를 마시며 서로의 초고 원고를 바꿔 읽는 영국의 어느 가정집 풍경이나, 행방불명된 조종사가 사막에서 만났던 어린 왕자와 재회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게 내가 그리는 작가의 삶은 낭만과 환상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책 제목을 읽은 영향일까.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글 쓰는 직업의 종류가 다양한지도 몰라서, 나의 꿈은 수필가도, 소설가도 아닌 그냥 작가였다. 그때는 자기 이름으로 된 책으로 책장을 채우는 사람이 작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종이를 모으는 일이었다.



쓰고 남은 공책, 낡은 연습장, 이면지 등을 차곡차곡 포개고 스테이플러로 찍어 여러 개의 묶음을 만들었다. 표지에 큼지막한 제목을 쓰고, 그 아래에 제목에 어울릴 법한 삽화를 그려 넣었다. 표지를 꾸미는 동안 상상만으로도 난 이미 한 권의 책을 쓰고, 출판한 유명 작가가 되곤 했다.



하지만 책의 구색이 갖춰졌다고 책이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한 줄, 한쪽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텅 빈 채로 남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 몇 쪽이라도 겨우 이어간 이야기도 결말을 내지 못한 채 중단됐다. 부족한 실력이 드러나는 상황을 무의식이 알아서 피한 거였다.



상상 속에서나마 작가로 살아남으려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이 나았다.

완성된 책이라는 게 작가의 자질이 없음을 증명한다면 

난 그 증거가 없었으면 했다.



책의 공백만큼 마음이 텅 빈 것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더 부지런히 책을 생산해서 서랍에 쌓았다. 그리고 책들을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서랍에 넣고 단단히 잠갔다. 금고에 넣어 두고 평생 쓰지 않을 돈처럼 말이다.



그러다 책을 만드는 수고를 덜어줄 더 간편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수첩에 번호를 붙여가며 쓸 책의 제목을 모아 적는 것이다. 공책(空冊)도 책이라면 그때 내가 출판한 책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마음속에도 도서관이 있다면, 수첩은 도서 열람 목록이었다.



때 내가 열람 목록에 쓴 제목은 <줄리는 새침데기 신입생>, <안나의 새 학기는 즐거워> 따위였다. 지경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소녀 명랑소설의 아류를 연상케 하는 제목이었다. 지금 절판된 그 소녀 명랑소설은 중고시장에서 웃돈을 주어도 못 사는 비싼 물건이 되었다. 나도 그때 <줄리는 새침데기 신입생>을 썼다면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인정받았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첩에 적은 백 개 이상의 제목 중에 실제로 쓴 책은 단 한 권도 없었으니까.





대입을 준비할 때쯤에 나는 서랍에 들어간 책과 수첩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다. 고등학생 본분에 충실하려면 글쓰기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친구들 사이로 이리저리 비밀스럽게 돌려 읽히던 공책 한 권 보고 내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반 친구 중 하나가 쓴 하이틴 로맨스였다. 공책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손글씨가 새까맣게 채워진 완결된 소설이었다.



그것은 반에서 꽤 인기가 좋아서, 누군가 읽고 있으면, 다른 친구들이 빨리 읽고 달라며 독촉을 했다. 작가가 된 친구는 제 작품을 남에게 보여주는 일을 조금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늘 침착하고 의연한 그의 태도는 같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프로 작가처럼 느껴졌다. 독자가 된 친구들은 작가에게 재미있었다는 둥, 읽다가 울었다는 둥 진지한 감상평을 건넸다. 그 모습을 보는데, 나는 눈물이 핑  정도로 질투가 났다.



괜히 그 작가가 밉고 

공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새까맣게 채운 그의 공책이 미다.



얼마나 옹졸했는지, 읽지도 않은 그의 소설을 평가절하하고 싶어졌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에게 극심한 열등감을 느끼던 살리에리와 다를 바 없었다. 끝까지 그 공책을 빌려 읽지 않은 건, 아마 반에서 나뿐이었을 것이다. 내용까지 좋으면 더 질투가 날까 봐 아예 읽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이후, 나는 작가가 되는 것과 무관한 삶을 살았다.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기 낳았다.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들지 않아도 상관없는 삶이었다. 가가 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 상상 속에서만 '작가'가 되어야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아주 빈약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런 내면을 직면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 에세이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제 민낯을 보여주고 싶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부끄러움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었다.  



에세이 공모전의 주제는 '책'이었다. 그 주제를 보는데 머릿속에 '제목밖에 없는 책'이 떠올랐고, 뭔가에 홀린 듯이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속 서 있으니 다리가 아파 싱크대 앞에 쪼그려 앉 계속 써나갔다. 진실을 내놓으라 멱살을 잡고 흔드는 손 같은 게 내게 매달려 있 게 틀림없다.  쓰면서, 내가 평생 작가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열망한 만큼 얼마나 겁 냈는지 더욱 분명해졌다.



하지만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시험 시간이 끝나가는데, 풀리지 않는 문제 하나를 초조하게 붙들고 있는 수험생이 된 것 같았다.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가 하원 할 시간 다가오자, 아무렇게나 량을 채워 이메일을 보내 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모전 담당자의 이메일 주소가 틀리지 않았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아주 욕심 없지는 않았 거다.



마감 일자가 지나도 무소식이기에 떨어졌다 싶었는데, 정말로 떨어졌다는 메일이 왔다. 씁쓸했지만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며 퇴짜 맞은 그 글을 다시  되었다.  정도로 엉망일 줄은 몰랐는데, 실소가 터질 정도다. A4 단 두 장인데, 앞장과 뒷장의 주제가 달랐다. 앞장은 '글을 쓰는데 자격은 없어. 너도 그 내용을 채울 수 있어!'라고 다부지게 외치고 있었고, 뒷장은 '작가를 꿈꿨기에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한 거야. 쓰지 못해도 잘 사는 게 중요해.'라며 한발 물러나 있었다. 어느 심사자라도 이런 갈팡질팡한 글에 점수를 주지 못했을 거였다.



나는 뒷장잘라냈다. 그리고 앞장의 끝부분에서부터 다시 이어 쓰기 시작했다. 조금 덜 수줍어하고, 조금 더 솔직해졌다. 그러고 나니 '공모에서 떨어졌다.'는 사건<제목밖에 없는 책>이라는 에세이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꼭 필요한 재료였다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제목밖에 없는 글>이라는 제목의 글에 내용을 채건, 스스로 내용 채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한 거였. 꿈을 간직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겁내지 않고 지금 바로 시작하는 삶을 보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목밖에 없는 >을 쓰고 공모에 도전한 것 자체가

일종의 행위 예술처럼 느껴졌다.

실패할 것이 뻔해도 끝까지 가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어떤 글은 손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행동이, 삶이 제 몸으로 직접 쓰 보. 실패가 내 인생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 이젠 성공이 보장되지 않을 일도 도전할 용기를 가지라고. 다시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작가가 되는 것을 지레 포기하지 말라고. 매회 주인공에게 당하는 악당도 변함없는 결기로 다음을 기약하지 않냐고, 조금 끈질겨지라고.



내가 달라 그건 두려움보다 열망이 더 커지는 순간 덕분일 것이다.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이 분명 존재하는 것을 알고, 현실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안다. 하지만 몽상 속의 천재 작가보다는 비웃음당하는 현실 작가가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제목밖에 없는 책> 채우는 건, 내면의 수치심과 맞서는 평생의 작업이 되겠지만, 그렇게라도 작가가 되고 싶었던 열 살 작은 소녀의 꿈을 이뤄주 싶다. 그게 공모전 실패로 값지게 얻은 이 글의 진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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