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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n Apr 17. 2020

'하이퍼 케이팝'에 대한 미완성 연대기

국내 뮤직 트렌드

곡 하나에서부터 글을 출발해보자. 몇 주 전에 나온 Itzy의 '24HRS'. 2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곡에는 단 두 개의 인상적인 구간만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마디 되지 않는 프리코러스(pre-chorus)에 등장하는 보컬과, 텅 빈 공간을 유일하게 채우는 건반, 그 외의 부분들을 둔탁하게 후려치는 베이스음과 랩. 강하고 무겁게 부풀어 오른 톤으로 한 마디 멜로디를 반복하는 이 베이스음을 만든 사람은 영국의 일렉트로닉 뮤지션 SOPHIE다. 2014년부터 발매된 SOPHIE의 싱글에는 '24HRS'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더 두껍고 낮은 베이스, 그리고 쨍하게 높은 전자음들이 정신없이, 거칠게 충돌하는 극단적인 사운드가 담겼다.


글ㅣ나원영(웹진웨이브 에디터)


ITZY '24HRS'

SOPHIE 'Hard'

SOPHIE 'Bipp'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즘부터 SOPHIE는 다른 팝 음악인들과의 작업에서 고유한 스타일을 다양하게 적용시켰는데, 2016년에 Charli XCX와 만든 'Vroom Vroom'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24HRS'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조금 더 극단적으로 표현된 느낌의 곡, 유일하게 울려 퍼지는 육중한 베이스음과 간간히 침입하는 날카롭게 밝은 소리들, 쉴 새 없는 파트 사이의 낙차를 강조하는 곡이었다. 이 곡이 나올 즘부터 Charli XCX는 오랜 댄스 팝의 사운드적 한계를 밀어붙이며 이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키거나 뒤틀어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팝"이라 부를 수 있을 곡들을 다양한 음악인들과 함께 만들었다. 작년에 그는 트와이스의 'GIRLS LIKE US'의 곡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초반부에 휘슬로 예고되기도 하는 인상적인 코러스 멜로디와 '24HRS'처럼 짧게 끊기며 반복되는 건반 소리, 그 뒤로 깔린 둔중한 베이스는 [Fancy You]에서 한 번 갱신된 트와이스의 깔끔한 완성도와 적절히 어우러졌다.


Charli XCX 'Vroom Vroom'

트와이스 'GIRLS LIKE US'


트와이스에게서 이러한 사운드가 갑작스럽게 한 번만 나타나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Charli XCX의 'Unlock It'라는 곡에 (재밌게도 박재범과 함께) 피처링으로 참여한 또 다른 팝 뮤지션 Kim Petras는 'GIRLS LIKE US'보다 한 해 전에 트와이스의 'YOUNG & WILD'를 작업했다. 곡의 뒤편에서 꽤 몸집을 부풀린 채 등장하는 낮은 신스음이나 그 주변부를 맴도는 여러 효과음들, 작사가이기도 한 채영의 랩이 끝난 다음에 코러스와 함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트랩 비트가 섞인 브레이크의 제법 강한 사운드들을 들어 보자. 어쩌면 이러한 요소들이 JYP 엔터테인먼트에 있어서는 앞서 언급한 곡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특징들은 확실히 2019년의 트와이스가 일군 인상적인 성과들을 대표할만하다고도 느껴진다. 일본 정규 2집에 수록됐고 채영이 작곡으로 참여하기도 한 'How u doin'은 'YOUNG & WILD'와 비슷하게 광활한 신스음의 질감으로 두 번씩 내리 찍히는 베이스를 깔았고, [Feel Special]의 여러 수록곡들에서도 비슷하게 부풀려진 채 짧고 굵게 찍히는 전자음들이나 중압감 있는 베이스, 날카롭게 찢어지는 효과음들과 맞부딪히는 사운드들이 이리저리 오르내리는 경우를 찾아들을 수 있다.


트와이스 'Young & Wild'

트와이스 'How U Doin'

트와이스 'Rainbow'

트와이스 'LOVE FOOLISH'

트와이스 'Breakthrough'


2019년의 트와이스와 Itzy의 성과를 말하자면 JYP가 가보고자 하는 새로운 방향성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동 시기 해외 팝 음악인들이 만든 사운드가 2010년대 중반에 A. G. Cook이라는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여러 전자 음악가들이 모인 레이블 PC Music과의 영향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SOPHIE의 사례와 비슷하게, 댄스 팝의 수많은 특징을 한계치까지 가속시키며 다양하게 과장된 부분들 사이의 충돌과 낙차를 두드러지게 대비시키는 것이 PC Music만의 어법이었다. 201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이 사운드는 자연스럽게 이후에 등장한 팝의 사운드에도 영향을 주었고, 물론 한국에서의 아이돌 팝도 조금씩 그 영향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다.


A. G. Cook 'Superstar'

easyfun 'Laplander'

QT 'Hey QT'

Danny L Harle 'Broken Flowers'

Hannah Diamond 'Hi'


90년대 후반의 SMP를 일종의 기원으로 가정한다면, 애초부터 아이돌 팝 작법의 근간에는 해외에서 유행했던 팝의 특징들을 아이돌 그룹이라는 형식에 맞춰 번안하듯 끌어온 후 여러 특징을 한꺼번에 재조합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고 둘 수 있겠다. 물론 아이돌 음악의 역사가 쌓일수록 각기 다른 장르 어법을 잘게 쪼개 담은 구간을 한 곡 안에서 조합할 때, 그 이음매를 보이지 않게 하거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잇는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 그렇지만 재미있게도, 이러한 아이돌 팝만의 특징이 인기를 얻고 산업 자체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부터 수많은 해외의 스타일을 짜깁기하는 방식 자체가 더욱 대놓고 드러나거나, 더 나아가 그 상충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 사이의 격한 차이를 활용하는 곡들이 다시금 등장하되 25년 전의 충격파를 자연스럽게 내재화해서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아이돌 팝이 가져오는 구성 요소들은 2010년대를 통과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했던 영미권 댄스 음악의 유행에 맞춰 달라져왔고, PC Music이 선구적으로 시도했던 새로운 팝의 사운드가 메인스트림 팝 음악에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현재의 아이돌 팝 또한 마찬가지를 시도해보는 셈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과장된 충격파를 중심에 둔 PC Music의 뒤틀린 사운드를 표현하는 여러 단어 중 하나인 "하이퍼 팝(Hyper Pop)"의 말 그대로 "과잉"된 특징이 어긋난 연결점들을 과도하게 합쳐 드러내는 아이돌 팝의 특징과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Sherlock'과 'I GOT A BOY' 같은 곡이 완전히 다른 모티프를 서로 다른 시간 순으로 배치하는 것에 초점을 뒀다면(이는 아이돌 팝에 익숙한 청자가 특정한 곡을 "SMP"적이라 느끼는 강한 근거이기도 하다), 사운드의 질감이나 공간적인 배치에도 큰 초점을 두는 "하이퍼"함이 여기에 섞여 나타나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JYP의 시도들뿐만 아니라, 위걸스의 'On Air' 초반부에 나오는 밝게 강조된 특징적인 사운드의 톤이 아이돌 팝에서는 꽤 자주 나왔던 트랩 브레이크 등과 맞닿는 순간, 또 (G)I-DLE의 ‘달라($$$)'에서 (마치 Itzy의 '24HRS'처럼) 반짝거리고 보글거리는 효과음이 깔린 채 잠깐잠깐 나타나는 신스음이 담긴 부분과 거칠게 두들겨대는 사운드가 깔린 트랩 비트 등이 급작스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낙차를 활용하는 순간 등이 그런 "공간적 배치"가 돋보이는 순간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코러스에 쿵쿵 내리 찍히는 세찬 금속질의 베이스와 청명하게 퍼져나가는 높은 신스음, 발랄하게 터지는 보컬이 한꺼번에 합쳐진다는 점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시그니처의 '눈누난나'와 NATURE의 'OOPSIE'에 대해서도, 또 어쩌면 위키미키의 'Picky Picky'에 중간마다 나타나는 신스음들이나 꾸물거리는 베이스음의 질감에 대해서도 엇비슷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위걸스 'On Air'

(G)I-DLE '달라($$$)'

시그니쳐 '눈누난나'

NATURE 'OOPSIE'

위키미키 'Picky Picky'


물론 아이돌 팝에서 PC Music, 혹은 그 영향으로 만들어진 영미권 팝의 사운드가 언뜻 엿보인다고 해서, 이것이 "하이퍼 케이팝"의 탄생이라 성급히 선언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이돌 팝에는 이미 여러 장르적 문법들이 갖춰져 있고, 더불어 상업적 성과를 추구한다는 한계가 있는 만큼 기존의 특징들을 한꺼번에 극단적으로 가속시켜 전복하는 아이돌 팝이 나타난 확률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본적으로 과다함과 잡다함의 감각을 생각보다도 많이 품은 채, 과잉과 분절마저 자연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표현되고 있는 점이 아이돌 팝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PC Music식의 "하이퍼 팝"은 그런 점에 있어서 아이돌 팝이 끌어온 다른 여러 문법들처럼 어느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돌 팝의 재료 중 하나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그 응축된 채 숨겨진 특징들의 과잉된 잠재력, 2020년대에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올지 모를 '하이퍼 케이팝'의 편린을 다음 곡들에서 찾아보자.


fromis_9 'FUN!'

CLC 'Call My Name'

EVERGLOW 'Salute'

ITZY 'Cherry'

ELRIS 'This Is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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