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Hi Fi 이야기
제가 학창시절을 보냈을 때는 일본이 전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일본의 영화 잡지는 그대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출간되었고, 일본의 패션 잡지에 실린 옷은 그 다음 날로 동대문 의류 상가에 전시되었죠. 저나 제 친구들은 일본의 헤비메탈 그룹인 LOUDNESS에 열광했고, 수업 시간에는 해적판 일본 만화책에 열광했으며, 미야자키 하야오를 필두로 한 재패니메이션의 황금기이기도 했습니다.
글ㅣ한지훈 (오디오 칼럼니스트)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듯 전 세계 문화의 중심은 대한민국입니다. 언제부터인가 BTS는 새 앨범을 낼 때마다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고, 봉준호 감독은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석권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에도 우리나라 배우들이 출연하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외국의 영화에 강남 거리가 나오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드라마는 전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의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말을 배우고 있고요. 그렇다면 외국에 우리나라를 처음 알린 아티스트는 누구일까요?
저는 정경화 선생이 아닐까 싶은데요.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의 공동 우승을 시작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70년 차이콥스키 협주곡 연주로 그녀는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그 이후 그녀는 수십 년 간 바이올린 여제(女帝)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습니다.
이게 왜 대단한 것이냐면 클래식 음악계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보수적인 곳이고, 소위 말하는 "대가"나 콩쿠르의 경우 주최 측의 입김이 대단히 강한 곳입니다. 이를테면 정경화 선생이 우승했던 당시의 레벤트리트 콩쿠르는 아이작 스턴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던 콩쿠르였고, 아이작 스턴은 우크라이나 태생이긴 했지만 유대계였기 때문에 미국의 클래식 음악계를 주무르던 유대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정경화가 출전하려고 했을 때에는 이스라엘 출신의 핀커스 주커만이 참가 의사를 밝히고 있었습니다. 물론 핀커스 주커만 역시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이미 우승자는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성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클래식 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분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면서 갑자기 유명해진 피아니스트로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예원학교 시절부터 유명했으며, 예원학교에서 썸머스쿨 식으로 방학 때 강의를 했던 제 지인은 예원학교 시절의 조성진이 자기보다 피아노를 잘 쳐서 좌절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조성진은 2008년 15세 때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요. 이 콩쿠르는 외국인 참가자에게 1위를 주지 않는, 그래서 만약 외국인 참가자가 2위를 했다면 그 사람이 실제적인 1위라고 인정을 받을 정도로 보수적인 콩쿠르입니다. 조성진은 그 벽을 뚫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을 한 겁니다. 이어서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3위에 입상하며 조성진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렸죠. 그리고 4년 뒤 그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 세계에 이제는 조성진의 시대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이런 스타 한 명의 등장은 단순히 국위을 선양해서 기분 좋은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스타의 등장은 곧 클래식 음반 시장의 활성화를 의미합니다. 조성진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클래식 음반 시장은 참혹하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그 이전 해에 우리나라에서 팔린 클래식 앨범을 모두 합쳐도 당시 최고의 인기 아이돌 그룹 한 팀이 판매한 양보다 적을 정도였으니까요.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조성진의 2015 쇼팽 콩쿠르 우승 실황 앨범은 당연히 그 해 클래식 앨범 판매 1위를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판매량 2위부터 99위까지의 앨범 판매량을 모두 합쳐도 조성진 앨범 한 장의 판매량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즉 조성진의 등장은 우리나라 클래식 앨범 시장에 인공호흡기의 등장을 의미했죠. 그리고 며칠 전, 그런 조성진의 새 앨범이 출반되었습니다.
이 앨범에 관한 해석이나 설명은 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깊은 내공을 자랑하시는 다른 분들께서 해주실 테니 저는 이 앨범의 녹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앨범은 베를린에 있는 Siemens-Villa에서 슈베르트의 환상곡과 베르그의 피아노 소나타를, 함부르크에 있는 Friedrich-Ebert-Halle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녹음했습니다. 즉 1번부터 8번 트랙까지는 베를린에서, 9번 트랙 이후부터는 함부르크에서 녹음했죠. 물론 프로듀서나 레코딩 엔지니어는 같은 사람이고요. 하지만 두 녹음의 소리는 제가 앨범을 모니터할 때 쓰는 전문가용 헤드폰이 아니라 스마트폰 살 때 들어있는 벌크 이어폰으로도 차이가 느껴지는데요.
Friedrich-Ebert-Halle은 2016년에 출반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앨범 중에서 4개의 발라드와 2018년 출반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앨범 중 두 번째 트랙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03번 B flat장조 KV 281와 세 번째 트랙인 피아노 소나타 12번 F장조 KV 332를 녹음한 스튜디오입니다. 즉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를 많이 들으신 분에게는 익숙한 소리의 스튜디오지요.
조성진의 피아노 녹음은 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피아노와 마이크의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이 사진 같은 일반적인 피아노 녹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죠. 이럴 경우 마이크는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만을 포집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녹음 스튜디오의 공명과 함께 피아노 소리를 포집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녹음을 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울림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녹음 스튜디오 자체의 사운드 세팅(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리버브, 즉 잔향의 길이)이 완벽해야 하고 전체 스튜디오 중 녹음하는 위치와 마이크의 감도 조절 등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녹음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세팅이 잘못된다면 해상도가 떨어지거나 스튜디오의 리버브가 필요이상으로 긴 경우 소리가 두루뭉술하게 들리는 단점이 있죠. 마이크가 멀리 있기에 마이크의 감도를 올려야 하고, 그러다 보니 녹음 시의 게인이 올라가기도 하고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조성진의 녹음은 녹음하는 스튜디오가 어디냐에 따라 소리가 많이 차이 나는 스타일입니다. 게다가 피아노의 튜닝부터 전체적인 세팅을 담당하는 피아노 테크니션이 다릅니다. 당연히 피아노의 컨디션이 다를 수밖에 없고 전체적인 홀의 크기나 홀의 리버브, 마이크의 높이 등 녹음과 관련된 많은 사항이 다르니 소리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을 신경 써서 듣는다면 음악 감상의 또 다른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크리스티안 치메르만은 "앞으로도 조성진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널리 기억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매해 발전을 거듭할 겁니다."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앨범에서의 연주는 치메르만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