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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on May 15. 2020

1719, 핫펠트의 시간

국내 뮤직 트렌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K-Pop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아티스트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을 했느냐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아이돌 음악은 (적어도 음악 내부적으로는) 쌓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주제와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특별한 부담 없이 K-Pop만의 화려함을 펼칠 수 있는 편리한 조건으로서 작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언제나 "음악을 듣는 이 순간"만을 추구하는 듯한 공허한 감각을 전달하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이유나 선미처럼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거스르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아이돌도 존재하니까. 그리고 이 흐름에 꽉꽉 눌러 담은 자신만의 시간을 드넓게 펼쳐 놓으며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핫펠트의 [1719]다.


글ㅣ정구원 (웹진웨이브 편집장)


잠겨 있던 시간, 흐르는 시간

[1719]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잠겨 있던 시간들"에 대한 앨범이라는 걸 첫 트랙 'Life Sucks'보다 극명하게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이 곡은 2017년 자신의 사기 행각에 핫펠트를 끌어들이려 했었던 아버지에 대한 곡이다. 29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온 (보석금을 요구하는) 편지로부터 시작해 "Life sucks for everybody"라는 외침으로 이어지는 이 곡의 서사와 감정선은 21세기 한국 대중음악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순간을 만들어낸다. 'Life Sucks'는 아이돌의 "잠겨 있던 시간"이 정말이지 어둡기 그지없을 수 있다는 것을, 강경한 표현과 그에 동반되는 슬픔을 통해 듣는 이의 정면으로 내어 놓는다. 진지하게 이 곡을 들었을 때, 우리는 핫펠트가 뚫고 온 시간을 직접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시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핫펠트가 겪었던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른 곡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Life Sucks'의 쓰라린 인상이 보다 커다란 진정성을 가져온 것일까? 하지만 핫펠트가 설사 어두울지라도 자신의 시간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작년 싱글 'Happy Now'로 증명된 바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시간들을 사려 깊게, 그리고 먹먹하게 돌아보는 노랫말은 핫펠트가 겪은 경험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직접적으로 와 닿게 만드는 요소다. "나는 날 사랑해서 / 사랑이 두려워서 / 내가 그렇게 / 널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 곁에 두고 싶었던 것 같아"라는 담담하지만 가슴을 치게 만드는 표현('피어싱')부터 밝게 빛나는 별이 아닌 흔들리는 위성의 빛을 자신의 불안과 용기로 승화시키는 비유('Satellite')까지.

그래서 그 시간이 잠겨 있을 뿐만 아니라 흐르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는 것이,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큰 힘이 된다. 핫펠트라는 책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과거의 순간을 돌아보는 '나란 책'에서, 울고 나서 일어난 아침의 슬픔을 청소와 함께 천천히 정리해 나가는 'Sweet Sensation'에서, 우리는 핫펠트의 시간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1719]에서 시간은 찾아볼 수 없거나 가상의 무언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명확한 무게를 가지고 잠겨 있거나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흐르고 있다.


핫펠트 - Life Sucks

핫펠트 - 나란 책 (Guitar Ver.)

핫펠트 - Satellite

핫펠트 - Sweet Sensation (Feat. SOLE)

핫펠트 - Happy Now


자신의 시간을 리드하는 목소리

가사로 표현된 그러한 시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물론 핫펠트의 목소리와 사운드다. 음악적 측면에서, [1719]는 핫펠트의 구심점이 파워풀한 아레나 팝 혹은 록으로부터 현대적인 R&B로 완전히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외피를 두르고 있긴 하지만 'Iron Girl'과 'Ain't Nobody'를 비롯한 [Me?]의 많은 트랙들, 그리고 본인이 작곡에 참여한 'Baby Don't Play'나 'One Black Night' 등의 원더걸스 트랙들은 80년대풍의 고전적인 팝/록적 영향이 지배적인 곡들이었다. 물론 이들 역시 직선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훌륭한 노래들이었지만, 개인의 시간과 감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풀어놓는 [1719]란 앨범의 방향성에는 SZA나 Kali Uchis의 풍미가 느껴지는 R&B가 훨씬 잘 맞는 방법론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꽉 찬 사운드를 자랑했던 JYP 시절의 결과물에 비해 빈 공간과 포인트가 될 만한 지점을 적극적으로 넘나드는 [1719]의 프로덕션에 핫펠트의 목소리는 연기의 톤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배우처럼 섞여 든다. 그저 한 사람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즐거운 K-Pop 앨범이 얼마만이던가? 'Life Sucks'의 피가 맺혀 있는 듯한, 하지만 극적인 과장 대신 날카로움을 예리하게 벼린 절규, 2년 전 이미 들었음에도 조금도 장난스러운 섹시함을 잃지 않은 '위로가 돼요'의 농염한 목소리,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공간감을 발산하는 '3분만'의 신시사이저와 섞이는 목소리, '피어싱'과 'Make Love'의 착 가라앉은 프로덕션을 각기 조금씩 다른 감정선으로 이끌어 나가는 목소리…

이 다양한 목소리들을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은 신뢰감이다. 단순히 "훌륭한 보컬이다"라는 것을 넘어서(우리는 그것을 [Me?]를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핫펠트는 자신의 시간을 보여주기 위한 속도를 각 곡마다 확실하게 정하고, 그것을 리드하고 있다. [1719]가 팝(특히 K-Pop)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무겁게 느껴지는 소재를 풀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짓눌리는 대신 담대함을 잃지 않는, 그럼으로써 듣는 이에게 믿음을 안겨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핫펠트 - 위로가 돼요

핫펠트 - 피어싱

핫펠트 - Make Love

핫펠트 - 3분만

핫펠트 - Ain't Nobody

원더걸스 - Baby Don't Play


[Me?]를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꽤 오랫동안 핫펠트의 다음 레코딩을 기다려 왔고, 그 기다림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것이 단순히 아무런 소식도 사건도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핫펠트는 자신이 잠겨 있었던 시간을 노래하는 앨범으로서 증명해 보인다. 자신의 음악을 내놓기 위해 박진영과 "세계대전"을 치르고, 여성과 아이돌, 걸그룹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예은"이 아닌 "핫펠트"란 이름을 택했던 이 아티스트의 잠겨 있었던 시간은 다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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