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헤드(Radiohead) 세계의 요약본

Radiohead [In Rainbows](2007)

by Melon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아니, 변했다고 보는 쪽이 맞다. 과거 라디오헤드 최고 명반 투표에서 여타 후보를 압살한 건 [OK Computer](1997)였다. 현재는 다르다. [OK Computer]의 거대한 존재감을 위협하는 앨범이 2장 정도는 된다. 하나는 저 유명한 [Kid A](2000),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음반 [In Rainbows](2007)다.


글ㅣ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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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중 [In Rainbows]를 선택한 이유는 자명하다. [OK Computer]는 너무 많이 말해졌고, [Kid A]는 왠지 뻔한 대안 같다. [In Rainbows]는 내가 가장 자주 꺼내 듣는 라디오헤드의 작품이기도 하다. 뭐랄까. 곡조라는 측면에서는 [The Bends](1995)를 능가하고, 실험이라는 측면에서는 [OK Computer]나 [Kid A]만큼 혁신적인 앨범이다. 그러니까, [In Rainbows]는 라디오헤드 세계를 잘 요약해낸 총체다. 무지개처럼 펼쳐진 이 음반 안에 그들의 유전자 정보가 다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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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톰 요크(Thom Yorke)가 [OK Computer]에 관한 남겼던 언급을 다시 찾아본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Bitches Brew](1970)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Bitches Brew]는 무언가 새로운 걸 창조하는 동시에 그것이 붕괴하는 걸 보여줬다. 이것이 그 음반의 아름다운 점"이라고 강조했다. [In Rainbows]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그들은 건설하면서 해체를 도모하고,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파괴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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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은 이 앨범을 두고 "낭비된 부분이라고는 없는, 라디오헤드 최고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과연 그렇다. 음반에서 라디오헤드는 해묵은 관습에 저항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핵심에 곧장 다가가는 사상가처럼 연주하고, 노래한다. 이를테면 헛된 사운드나 진부한 접근 따위 끼어들 여지조차 주지 않는 셈이다. 음악이라는 바다 위에서 그들은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는 예리한 선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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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비트를 기반으로 하는 아트 록 '15 Step'을 시작으로 섬뜩할 정도의 차분한 정서로 커튼을 내리는 'Videotape'에 이르기까지, 전곡의 만듦새가 구멍 하나 없이 탁월하다. 4분의 5박자 전자 드럼으로 플라밍고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15 Step'은 'Airbag' 이후 최고의 오프닝이라 할 만하고, 'Bodysnatchers'에서는 맹렬한 록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전달하는 와중에 능란한 완급 조절과 톤 변화로 곡을 입체적인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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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Nude'는 어떤가. 무엇보다 이-보우(E-Bow)를 사용하고, 현악 세션과 하몬드 오르간 연주를 더해 곡의 관능적인 라인을 풍성한 결로 가꿔냈다는 점을 강조해야 마땅하다. 나는 이 곡을 듣는 오랜 습관이 있는데 눈이 많이 온 날 아침, 이어폰을 끼고 이 곡을 플레이한 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산책을 하는 거다. 올 겨울, 당신도 한번 시도해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기분,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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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적으로 돋보이는 트랙을 (굳이) 꼽자면 'Weird Fishes/Arpeggi'와 'Reckoner', 이렇게 두 곡이 최고다. 전자가 아르페지오 기타와 다채로운 구성으로 극한의 정밀함을 구현했다면 후자는 재즈 뮤지션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도 커버했을 만큼 우아하게 펼쳐지는 섬세한 바이브가 일품이다. 물론 단지 바이브만은 아니다. 서걱거리는 핸드 셰이커로 듣는 재미를 극대화한 것도 'Reckoner'를 되풀이해 감상하게 하는 주요한 동력이다. 한데 이 두 곡은 스튜디오 버전도 훌륭하지만 'From The Basement Live'가 "찐"이다. 유튜브에 있으니 찾아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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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도 매력적인 곡들이 여럿이다. 신비롭고 유려한 'House of Cards'가 위태로운 욕망의 이면을 그려낸다면 'Jigsaw Falling into Place'는 폭력적인 사회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관찰한 결과물이다. 과연, 라디오헤드는 이런 자극적인 주제를 한없이 내밀하면서도 필요할 땐 드라마틱한 서사로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밴드다. 글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초(超)메이저급 밴드 중에서는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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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의 내면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그것을 해제할 수 있는 음악적인 마법 같은 게 존재한다면 라디오헤드에게는 마치 비밀번호의 모든 조합을 무력화할 수 있는 마스터키가 쥐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In Rainbows]는 그중에서도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원하는 만큼 지불하는(Pay What You Want)" 방식으로 공개된 이 음반의 다운로드 수익은 이전까지 그들이 음반사를 통해 받았던 디지털 음원 수익 전체를 단번에 뛰어넘었고, 이후 공개된 디스크 박스는 10만 장, CD는 약 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In Rainbows]는 [Kid A]와 함께 라디오헤드의 유이(唯二)한 빌보드 1위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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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우리는 보통 라디오헤드 명곡 영순위로 'Paranoid Android'를 꼽는다. 한데 그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팝적이며 더 전통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음에도 앨범 단위로 'Paranoid Android'와 비견될 만한 성취를 일궈낸 경우는 딱 하나뿐이다. 바로 이 음반 [In Rainbow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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