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Hi Fi 이야기
오디오는 오디오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취미입니다. 앰프나 스피커 한 조에 몇 억 원씩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케이블 하나에 몇 천만 원, 심지어는 인터넷 케이블이나 USB 케이블도 몇 십만 원씩 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글ㅣ한지훈 (오디오 칼럼니스트)
그러면서도 대단히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데요. 대단히 이성적(!)으로 오디오를 한다고 자부하는 제가 895만 원짜리 D/A 컨버터를 살 때에는 "인생 뭐 있나?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생각으로 그 비싼 D/A 컨버터를 그 자리에서 현찰로(실제로는 계좌이체) 결제하면서 그 며칠 뒤 여름옷을 살 때에는 반팔 티 다섯 장에 반바지 두 개를 사면서 8만원도 안 하는 돈에 벌벌 떨며 살까 말까 고민을 하는 제 모습을 보며 어이없어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오디오를 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고, 그렇기에 가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을 본 지인들은 "저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데요. 이를테면 옷은 만 원도 안 하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서 시계는 명품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의 시계를 감고 나가면 "야, 네가 차면 그 시계도 짝퉁처럼 보이니까 옷을 제대로 입고 다니거나 아니면 시계를 다른 걸 차고 다니거나 해."라는 핀잔을 종종 듣곤 합니다. 뭐 저란 사람의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그런 걸 보면 온몸에 명품을 걸치고 람보르기니나 페라리를 타고 다녀도 짝퉁을 몸에 감은 대리운전 기사 정도로 보이니 그러려니 하고 말죠. 물론 람보르기니나 페라리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긴 하지만요.
위의 예에서처럼 사람들은 "격"을 매우 중시하고, 격에 어울리지 않으면 그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일생생활에서뿐만이 아니라 오디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요. 오디오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베스트 매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A라는 스피커는 B라는 파워앰프와 C라는 프리앰프에 연결했을 때 가장 좋은 소리를 들려준다는 의미지요. 예를 들어 탄노이 블랙 스피커에는 PX25라는 진공관을 출력관으로 사용하는 데카 데콜라 파워앰프와 노이만의 WV2 프리앰프나 마란츠 모델 7 프리앰프를 연결했을 때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 그런 말이지요.
실제로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베스트 매칭"이라는 조합은 꽤 좋은 소리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합이니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요. 이런 베스트 매칭은 대부분 비슷한 등급의 제품끼리 묶여있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위에서 말한 조합에서의 스피커는 웬만한 독일산 중형 승용차보다 훨씬 비싸고, 문제는 돈이 있다고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데카 데콜라 파워앰프나 WV2 프리앰프 역시 우리가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독일산 바이크나 이탈리아산 바이크보다 비싸지요. 저 조합은 빈티지 하이엔드 프리앰프의 상징인 마란츠 모델 7이 대단히 저렴하고 가성비가 좋은 앰프처럼 보이는 조합입니다. 무슨 말인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나 페라리 SF90 스트라달레에 비해 포르쉐 911 터보S가 가성비 좋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런 조합이 정답인가? 에 대한 생각을 해볼까요? 승차감보다 하차감이 중요한 차가 있듯이 오디오라는 취미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보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모 브랜드의 앰프는 마크레빈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존 컬이라는 앰프 디자이너가 설계한 앰프로 성능이나 내구성 그 어느 하나도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구동이 어렵기로 소문난 B&W 800 D3 같은 스피커도 여유롭게 구동하며 그 스피커에서 내줄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앰프지요. 만약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그 앰프의 가격표에 "0"이 하나 더 붙어있는 앰프들과 견준다고 해도 이 앰프의 손을 들어줄 만한 그런 앰프입니다. 특히 모니터 계열의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안이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며 정확한 소리를 들려주죠.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집에서 B&W 800 D3 스피커에 그 앰프를 연결해서 듣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싸고, 디자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라지만 그 앰프는 누가 봐도 못생긴 그런 앰프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싸서 문제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B&W 800 D3 스피커는 B&W를 상징하는 플래그쉽 스피커인데 비해 그 앰프는 웬만한 프로용 앰프보다 조금 비싼 정도의 가격이니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정말 소리만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말하는 "베스트 매칭"과는 다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기도 한데요.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클래식 레이블인 데카에서는 Decca Legends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모니터 스피커로 B&W 801 시리즈 1이라는 스피커를 사용하면서 이 스피커를 구동할 파워앰프로 H&H V800이라는 앰프를 모노블록(하나의 스피커를 하나의 파워앰프로 구동하는, 그래서 두 개의 파워앰프가 필요한 구성. 필자 주)으로 구성하여 사용했습니다.
오디오를 정말 오래하시고 다양한 앰프를 경험하신 분도 H&H V800이라는 앰프는 처음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 앰프는 스피커의 임피던스가 8Ω일 때 250와트(스테레오) 또는 800와트(모노)의 출력을 내는, 하이파이용이라기보다는 프로용 앰프입니다. Van Halen의 기타리스트인 Eddie Van Halen이나 Thin Lizzy, Whitesnake 등에서 기타를 쳤던 John Sykes가 기타 캐비닛 구동용으로 사용했던 앰프죠. 설마 데카에서 하이엔드 파워앰프를 살 돈이 없어서 기타 앰프로나 쓰이는 앰프를 사용했을까요? 데카의 사운드 엔지니어 판단에는 이 앰프가 B&W의 스피커를 구동하는데 가장 좋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요. 제 메인 오디오 시스템의 스피커인 JBL 4343 스피커는 비싼 스피커는 아니지만 한때나마 JBL 모니터 시스템의 정점을 찍었던 스피커이고, 40여 년 전에 출시되었지만 이미 그 때에 슈퍼트위터를 장착한 4웨이 구성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스피커입니다. 문제는 15인치 우퍼에 유닛이 네 개나 되다 보니 결코 구동이 쉬운 스피커는 아닌데요.
제가 이 스피커를 쓰면서 가장 좋은 소리를 들었던, 그래서 지금도 이 스피커의 메인 앰프로 자리 잡고 있는 앰프는 에어나 마크레빈슨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의 앰프가 아니라 프로용 앰프로 유명한 크라운 사의 스튜디오 레퍼런스 II 라는 파워앰프 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앰프의 브랜드와 생김새만 보고 뭐 저런 앰프를 이렇게 구하기 힘든 스피커에 연결하냐는 타박을 많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소리를 들려주면 깊은 침묵에 빠지곤 했죠.
물론 JBL 4343 스피커에는 이 앰프 이외에도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베스트 매칭은 다를 수 있습니다. 공간이 다르고 듣는 장르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A에는 B다"라는 고정관념을 깰 때, 오디오는 더 재미있어집니다. 다음 주에는 오디오의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를 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