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lon Aug 13. 2020

폭넓은 사운드의 장을 일궈낸 앨범

015B [015B Big 5] (1994)

한국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The Alan Parsons Project)가 발표한 최고작이다. 누군가는 6집을 꼽을 수도, 다른 누군가는 3집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딱 하나만 꼽으라면 5집이 영순위일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정석원의 다음 언급 그대로다. "1,2,3집은 지금 들어보면 좀 촌스럽다." 그러나 5집 [Big 5]는 다르다. 다시, 정석원의 말을 빌려 "편곡과 사운드가 시간이 흘렀어도 스타일리시하게 느껴진다."


글ㅣ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사진 출처ㅣ015B 페이스북 및 인스타그램


그랬다. 스타일이 끝내줬다. 비록 시간의 때가 묻은 감 없지 않지만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당대 최고로 "힙"한 노래였다. 일단 가사부터 기왕의 사랑 노래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쿨"했고, (만약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엑스 세대" 그 자체였다. 노랫말을 일단 보자.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기실 엑스 세대는 미국에서 출발한 세대론이다. 그래서 한국에 고스란히 가져와 적용하기에는 맞지 않는 측면이 여럿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경제적인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엑스 세대가 사회에 진출할 무렵인 1980년대 미국은 실업률 10%가 넘는 최악의 암흑기였다.

반면 한국에서 엑스 세대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1990년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에 해당된다. 즉, 한국의 엑스 세대는 1980년대 중반 급속한 성장기에 10대를 보내고, 20대 초반에는 문민정부 하에서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누린 윤택한 세대를 의미하는 셈이다.

풀어보자면 이런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소비를 지향했던 세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즐겁기 위해 소비하기도 했던 최초의 세대, 그 와중에 남들과는 다른 소비를 원했던 세대." 하긴, 엑스 세대의 주요한 구호가 "나는 달라" 아니었나. 그건, 이전까지 한국에 없던 취향의 선언이었다. 이념에서 취향으로의 중력 이동이었다. 1990년대에 20대를 향유한 집단을 향해 "쿨"하다는 수식이 한국 사회에 처음 등장한 바탕이다.

물론 공일오비가 "쿨"한 노래만 추구한 건 아니었다. '텅 빈 거리에서', 'H에게',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 '5월 12일' 등이 증명하듯 그들은 서정적인 이별 노래 쓰는데도 선수였다. 공일오비는 가히 극단의 정서를 오고 간 그룹이다. 예를 들어 '텅 빈 거리에서'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을 대조해보라.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과 '신 인류의 사랑'은 또 어떤가. 전자인 '텅 빈 거리에서'와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은 뜨겁다. 반면 후자인 '아주 오래된 연인들'과 '신 인류의 사랑'은 전례 없이 쿨했다.

음악은 보편성과 특수성이 교차하는 어떤 지점에서 본래 지녔던 잠재력 이상의 예측 불가능한 폭발력을 얻고는 한다. 공일오비 음악이 정확히 그랬다. '신 인류의 사랑' 같은 트렌드 송으로 1990년대의 특수한 지점을 겨냥하는 동시에 멜로디가 선명한 발라드라는 만능 키로 더 넓은 팬 베이스를 쌓아 올렸으니까 말이다. 이는 미디어적인 관점에서도 해석 가능하다. 전자가 TV용이었다면 후자는 라디오 프렌들리한 경우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복합적인 특성이 최신 사운드를 만나 정점을 찍은 앨범이 바로 5집 [Big 5]다. 음반은 '바보들의 세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먼저 던진다. 당시 유행한 인더스트리얼을 도입한 이 곡은 제목 그대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음반 후반부에 위치한 일렉트로 펑크(funk) 'Netizen'과 함께 '4210301', '적(敵) 녹색인생'의 계보를 잇는 노래가 되는 셈이다.

분위기는 '슬픈 인연'으로 급격히 전환되나 어색하지 않다. 도리어 듣는 이를 환기해 집중력을 쭉 끌어올리는 쪽에 가깝다. '슬픈 인연'의 어쿠스틱한 전주를 '바보들의 세상' 디스토션 기타 후주로 활용한 덕분이다. 이 노래가 위에 설명한 "쿨"과 "핫" 중 어디에 속하는지는 굳이 부기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다만 한 가지, 이 곡의 오리지널을 부른 가수는 나미가 아니다. 이 곡, 원래 일본 노래다. 이걸 나미가 번안해 커버했고, 나미의 커버를 공일오비가 다시 부른 것이다.

음반에는 커버가 하나 더 있다. 저 유명한 '단발머리'다. 먼저 공일오비는 조용필 원곡의 도입부를 그대로 차용해 원전을 향한 경의를 표했다. 그 뒤부터는 1990년대적인 비트가 너울지면서 춤을 춘다. 그러니까 이것은 1980년대 디스코와 1990년대 뉴 잭 스윙의 결합을 통한 동시대적인 업데이트, 즉 공일오비라는 밴드가 제일 잘하는 분야다.

공일오비가 뉴 잭 스윙에 꽂혀 있었다는 건 '마지막 사랑'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러면서도 소리가 촌스럽지 않다. 이어지는 곡 '시간'은 그렇다면 어떤가. 녹음 상태가 기가 막히다. 녹이 슬었다는 느낌조차 없다. "작곡하는 순간 믹스다운까지 다 그려놓는 사람". 윤종신이 정석원을 향해 보낸 찬사는 아마도 이런 측면을 고려한 것이었으리라. 또, 뉴 잭 스윙 아닌 이별을 노래하는 공일오비산(産) 정통 발라드의 계보를 잇는 곡이 없을 리 없다.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와 '그녀의 딸은 세살이에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당대 대중의 취향을 포착하는 민감한 레이더야말로 공일오비의 재능이었음에 분명하다. 장르에 대한 왕성한 탐구심도 빼놓을 수 없다. 5집만 해도 록, 일렉트로, 인더스트리얼, 디스코, 뉴 잭 스윙 등, 여러 장르를 무람없이 오가면서 전례 없이 폭넓은 사운드의 장을 일궈냈다.

하나 더 있다. 사회적인 메시지('바보들의 세상', '결혼', 'Netizen')를 곳곳에 더해 탐욕으로 가득한 현대사회를 차갑게 비판하는 와중에 '아직도 희망은 있어'를 통해 끝내 온기를 잃지 않는다. 부디 이 곡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공일오비 디스코그라피를 통틀어 가장 가슴 벅찬 마무리가 거기에 머물러 있을 테니까.




015B [015B Big 5] (1994)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그레시브 메탈 장르 자체의 걸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