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논제 - 닥치고 OO / 2012.04.13
"닥치고 벗어!"
군의관은 윽박지르듯 내게 명령했다. 상명하복의 군대라 했던가. 헌법이 보장한 신체의 자유를 운운하며 그들의 요구에 불응하던 내게 그 군의관이 던진 한마디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항문검사’라니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허공만을 응시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 어릴 적에 옷을 갈아 입힐 때도 ‘닥치고’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내 옷을 벗기려 드는 것일까.
그것은 내게 모멸감이었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곳을 낯선 자에게 구석구석 관찰 당할 것을 생각하니 수치심에 눈꺼풀이 떨렸다.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성기는 목욕탕에서 아버지에게도, 형제에게도, 친구에게도 쉽게 내보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남자들끼리의 관계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또한 자발적인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방적인 것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제외한 백여명의 젊은이는 이미 허리를 90°로 꺾고 손으로 양 볼기짝을 잡아 군의관이 쉽게 그곳을 관찰할 수 있도록 ‘ㄱ’자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저들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실내체육관을 임시로 사용하는 거대한 검사장은 무거운 침묵만이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의 반발 끝에 이어진 "닥치고 벗어!"는 2월의 공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 벗지 않았다. 입에선 허연 입김이 나왔다. 다른 입소자들의 입에서도 입김이 나왔다. 그들은 ‘ㄱ’자 자세를 하고 다리 사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그만하고 빨리 끝내기를 바라는 원망 섞인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따갑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결단을 해야 했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바지를 내렸다. 나도 다른 입소자들처럼 ‘ㄱ’자 자세를 취했다. 감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차례는 예상보다 너무 빨리 지나갔다. 군의관은 보는둥 마는둥 나를 지나쳤다. 확신컨데 그는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기껏 요구를 들어줬더니 그들이 꼭 필요하다는 그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무시당했다. 결연했던 나의 싸움은 웃음거리가 됐다. 모욕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하던 내가 이제 와서 왜 제대로 보지 않느냐고 따질 수는 없으니까.
그 사건 이후 나는 왠지 힘이 없었다. 단지 시키면 하는 군인이 되어버렸다. 거세당한 강아지처럼 명령을 따랐다. 어쩌면 ‘항문검사’라는 과정은 압도적인 권력 앞에 가장 수치스러운 곳까지 까보이게 만듦으로써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단지 조직의 부속품임을 각인시키려 하는 것 아닐까. 헌법은 개인의 자유가 공공복리를 위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부디 나의 항문이 공공의 복리를 위해 공개되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