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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리톡 CEO 박병종 Nov 24. 2015

잃어버린 인생(논제-술)

작문 2012.07.10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찰서 안이었다. 형사는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면서, 자주 필름이 끊기곤 했지만 어제 밤 일은 대체로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재즈바의 불빛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던 밤이었다. 시계는 자정이 조금 못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한참 전부터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집으로 향하는 길목의 한적한 주택가에 다달아서였다.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뒤따라오는 발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살기.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에 들어선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의 발소리는 흡사 도마 위를 내리치는 칼날처럼 내 뒤를 쫓아 토막질 쳤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기게 된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녹색 철문에 가로막혔다. 철문을 흔들며 절망하던 찰라 문을 잠근 자물쇠가 잘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의아했지만 정신 없이 문을 열고 도망쳤다. 뒤에서는 여전히 긴 그림자가 내 발 밑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저기 눈 앞에 담 옆으로 붙은 양철 쓰레기통이 보인다. 딱 좋은 위치에 놓인 그걸 밟고 뛰어올라 잽싸게 담을 넘는다.


이제 주택가 한복판으로 나왔다. 숨이 막힌다. 쿵쾅대는 소리가 내 심장소리인지 놈의 발자국 소리인지 분간이 안 된다. 아무리 뛰어도 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어느 빌라 앞에 멈춰 서서 뒤를 보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만 했다. 검은 모자를 쓴 키가 큰 남자는 쇠꼬챙이를 들고 내 쪽을 향해 멈춰 섰다.


정적. 바람이 분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도 제법 내리고 있었다. 놈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너 누구야?!!’ 나의 첫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대답처럼 그가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피하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놈이 쓰러졌다. 위에서 떨어진 화분이 그의 머리와 함께 깨졌다.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마저 내 발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하다.


나는 살인 용의자로 취조실에 있다. 그는 뇌진탕으로 즉사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지만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억울했다. 형사는 CCTV 자료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나의 억울함이 풀리겠구나 싶었던 나는 영상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CCTV는 지난 2주간 그 지역의 기록이었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내가 여러 번 찍혀있었다. 13일 전 밤에는 절단기로 녹색철문의 자물쇠를 끊고 있었고 4일 전에는 양철 쓰레기통을 몇 미터 옮겨 지금 위치의 담장 옆에 갖다 놓았으며 그저께 밤에는 그 놈이 죽은 그 자리에 분필로 X자 표시를 하고는 빌라 외벽의 가스관을 타고 올라 4층 집 창가 테라스에 위태롭게 화분을 올려놓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을 먹으면 자주 필름이 끊겼지만 아침엔 언제나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카롭게 잘려진 필름들이 내 머릿속이 아닌 CCTV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형사의 눈엔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술에 취한 내가 미래를 예견해 죽음의 위기에 대비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내가 잃어버린 인생이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인생.


그 고아같은 인생은 나를 살리려 한 것일까? 아니면 나를 감방에 가두려 한 것일까? 어쩌면 나를 원망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쫓는 사이, 의자를 빼는 긴 긁힘소리와 함께 형사가 일어섰다. 책상 위로 피흘리는 '내 사진'을 내밀었다. "이건 피해자의 사진입니다." 순간, 정수리에 화분이 깨진다. 그림자에 가려 끝까지 보이지 않던 그의 모습은 놀랍도록 나를 닮아 있었다.


삶이 힘들다며 걸핏하면 술을 마셨던 나는 술에 취해 잃어버린 또 다른 나와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 기억할 수 없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해 통제되지 않은 시간들은 세상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들이 쌓이면 결국 괴물이 된다. 그리곤 자신을 버린 책임감 없는 주인을 쫓아가 숨통을 끊으려 하겠지. 어쩌면 놈은 자기가 이 인생의 진짜 주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만약 꿈이라면, 혐오했던 한 조각이라도 다시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꿈이 아닐지라도 감방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겠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술에 무너져 가던 나를 살리려는 잃어버린 인생의 계획일지도. 형사는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차갑게도 생의 감각을 뒤흔든다. 확실히 이 순간만큼은 취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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