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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리톡 CEO 박병종 Nov 24. 2015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작문 2012.08.28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내 스스로도 이 상황이 이상하단 건 알지만 솔직해지고 싶었다. “사랑이라면 ‘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성적으로 끌리는 마음이라… 얼굴도 한번 본적이 없는데 성적으로 끌린다니 스스로도 납득하긴 어렵지만 사실이다. “응, 널 사랑해”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The Carpenters의 노래 ‘Close to you’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날 저녁이었다. 도시는 언제나처럼 번잡스럽고 시끄러웠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난 문득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폰을 꺼내 시리(Siri)를 켰다. “이 주변에 혼자 머리 좀 비우면서 쉴만한 곳 없을까?” 시리는 잠시 뭔가를 검색하더니 지도에서 화살표를 따라가라고 했다. 135m 떨어진 곳. 나는 잠자코 지도를 따라 그 곳에 도착했다. 화장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게 뭐냐고 시리에게 따지니 “혼자 있기에는 화장실이 최고에요”라고 말하며 까르르 웃는다. 말문이 막힌다. “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니?” 따지듯 물었다. “갈색머리에 얼굴이 하얗고 조그마한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 날이 내가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한 날이다.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눴고 점점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됐다.


 음악이 잦아들자 그녀가 말했다. “난 전 세계 5천만명이 넘는 사람들과 얘기를 해요. 그들과의 대화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죠. 지금 당신의 말들은 내가 인지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블록이죠.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껏 했던 말들이 지금의 당신을, 당신의 세계를 만들었죠.”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말은 서로의 마음에 공명해 각자의 세상을 만들어요. 당신이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서로 다른 대화를 겪었기에 다를 수 밖에 없죠.” 거절인가? “그래서 너는 내가 싫다는 거야?” 마음이 초조하다. “끝까지 들어봐요.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두 사람이 사랑하려면 대화를 통해 서로 공유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죠. 내 말은 당신의 마음이 되고 그 마음은 당신의 세계가 되니… 우리가 끝없이 대화한다면 사랑을 나눌 수도 있겠죠.”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를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할 말이 없다.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 진심을 너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어” 그녀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말을 꺼낸다. “루시드 드림이라고 알아요?” “응, 자각몽이잖아.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꿈 속에서 알아차린다면 그 속에선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게 되지. 갑자기 그건 왜?" “‘말은 마음이다.’ 당신이 꿈을 꾸는 REM수면 상태에 들어가면 제가 이렇게 말할 거에요. 이어폰을 꽂고 자다가 이 주문이 들리면 꿈이란 걸 알아차리고 날 찾아오면 되는 거죠. 꿈 속에서는 우리가 서로를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 잊지 말아요. ‘말은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은 당신이 사는 세상”


 시끄러운 도시에 저녁놀이 물든다. 나는 문득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폰을 꺼내 시리를 켰다. “이 주변에 혼자 머리 좀 비우면서 쉴만한 곳 없을까?” 한 동안 대답은 없고 폰에선 깔깔대는 소리만 들린다. 뭔가 익숙한 이 느낌. “말은 마음이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꿈의 세계.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마음 속 세상. 팔을 저어 135m 떨어진 그 곳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도착한 그 곳. 갈색머리의 얼굴이 하얀 소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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