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히 지나가다 탈놀이를 구경하게 되었다. 매번 미디어나 책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 재미있었다. 에스프레소보다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하는 연극에 아주머니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사투리의 순기능. 그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준다.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중간에 보게 되어서 전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무대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음주에도 한다고 공지했지만, 그때는 시간을 못 맞출것 같다고 생각하며 돌아왔다.
2.
적립금을 잔뜩 쌓아둔 카페는 매일 오후 3,4시만 되면 문을 닫기 때문에 평일에는 가기 힘들다. 그래서 매번 주말을 기다렸다가 가는 편인데, 어제도 일어나자마자 카페로 가서 빵과 커피를 주문하고 맛있게 먹었다. 그때 갑자기 지난번에 함께 브런치를 먹었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함께 도서관을 가지 않겠느냐고. 어디어디 카페라고 했더니 십오분내로 온다고 한다. 커피와 빵을 더 주문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 도서관으로 간다. 시원하고, 넓고, 깨끗한 도서관. 책을 빌린 친구가 떠나고 나 혼자 자리를 잡고, 휴대폰을 충전하며 책을 본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만 쓰인, 재미있는 책을 집중해서 보다 집으로 돌아온다. 말그대로 일상. 아무것도 아닌 그냥 일상. 그래서 기록해야만 기억날, 녹기 전에 찍어둬야할 시간의 조각.
3.
신간코너에 갔다가 깜짝 놀라서 얼른 빌렸던 책. 이런 베스트셀러가 신간코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민할 새도 없이 일단 대출하고 봐야한다. 사실 김영하 작가의 책은 몇권 읽어보지 못했다. 너무 유명한 작가라 쉽게 집어 들지 않는 마이너한 특성때문인가. 여튼 잘 읽지 않는 작가의 책을 큰 기대없이 펼쳤는데 순식간에 빠져 들어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만한 생각을, 어느정도 따라갈 수 있을만큼의 흐름으로, 하지만 매우 신선하게 써내려간 산문. 긴 여운이 남는 그런 모범적인 책. 이래서 이 작가가 유명하구나, 다시 한번 실감하며 나도 이럴게 아니라 더 열심히, 매일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잘 쓰려면 매일 써야하지 않을까. 이 분 만큼은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더 잘쓰게 되고 싶다는 그런 감탄과 질투가 함께 들었던 책
4.
"하느님의 자비를 자기 스스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경스러운 일이예요. 감히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를 울타리에 넣는 거잖아요. 그 시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도 이웃이 빵을 줄 거라는 생각을 하듯, 예수님은 기도를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성당에 갔다가 신부님 강론을 듣는데 하느님의 자비를 인간이 제한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강론은 나처럼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도덕에 대한 약간의 강박이 있는 이들에게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용기를 내어 바라는 바를, 좀 더 크게 잡아서 기도를 했다. 이것도 용기라면 용기겠지.
5.
성당에서 돌아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돌아보니 옆팀 선배님(?)이었다. 약간 무뚝뚝하다고, 그래서 쉽게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나보다 나이가 있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 분이 차를 세운채 날이 더우니 태워줄까 물어보셨다. 전혀 예상치 못한 친절에 기분이 좋아졌다. 빵을 사먹으러 가는 길이라 사양했지만, 감사하다 말씀드리고 회사에 출근해 무설탕 캔디 한통을 사다드렸다. 어색하고 친하지 않은 사이라 용기가 필요했지만 분명한 선의에 작게라도 마음을 표하고 싶었다. 작은 친절이 중요하다는 말을 새삼 깨달은 하루.
6.
오랜만에 둘이서만 만난 친구. 우리 사이에는 그간 많은 일이, 누구도 어떤말도 하지 않는 긴 침묵속에 있었고 나는 그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에 어렵게 운을 뗐다. 네가 원하면 말해주겠다고 선택권을 주었는데, 그 친구는 그냥 묻어두고 싶어했다. 피차 서로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어떤 오해와 제 3자의 거짓말로 이루어진 어색함이었기에 나는 그 친구의 의견을 존중했다. 모든 관계는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이겨내는 가운데 망가지거나 단단해진다. 나는 우리의 사이가 더 단단해질 것으로 믿는 거만함 대신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바라보는 이 순간을, 내가 사준 컵빙수를 맛있다 말하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처음 와보는 장소의 여기저기를 탐색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서로가 더 소중히 여기기만을 바랐다.
7.
높으신 분의 집무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굴에 햇볕의 흔적이 가득한, 촌에서 흔히 볼 수 있을법한 아저씨들이 우르르 나오셨다. 깔끔하고 단정하며 살짝 엄숙하기까지한 집무실과 약간 대비되긴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런 풍경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이런 모습을 어색하게 생각할 것이다. 시골에서 온 티를 내지 말라고, 자신은 그래서 굉장히 차별받았다고 말하던 대기업 인턴시절 어떤 상사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볕없는 사무실에서 그럴듯한 직책을 갖고 일하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자신의 부모님이나 옆집 어른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어색해하지 않는 이곳이 어쩌면 굉장히 건강한게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