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지금을 좋아할 필요는 없다.
1.
처음으로 독서동아리(?) 독서프로그램(?) 같은걸 해봤다. '좀머씨 이야기'를 읽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생각보다는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다라. 다들 그림도 잘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선은 결국 그 사람이 걸어온 삶의 궤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어서인지 다들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내 그림을 보고, 내 의견을 들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 해석은 매우 고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것이라 신선하지 않아서인가. 그에비해 다른 사람들의 그림과 의견은 참 새롭더라.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다음주도 아직 남아 있지만.
2.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날씨를 안봐서 모르지만 아마도 넉넉하게 영하권이 아닐까. 나무들이 달고 있는 낙엽도 이제는 절반이 남지 않았다. 건조해서 얼굴도 당기고 코도 괴롭다.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눈이 내릴것이다. 겨울은 건조해서 나 조차도 바짝 말라버릴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물론 착각이다. 밤에 잠을 자야 낮에 활동을 잘 할 수 있듯 겨울에 너무 여기저기 쏘다니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은것 같다. 맞는 말이야. 겨울엔 집안에서 조용히 체력을 보충해야겠다.
3.
언니와 김장을 하는데 30포기밖에 안하는데도 꽤나 고된 시간을 보냈다. 김치를 처음부터 직접 만드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배추를 수확하는 것부터 버무리는 것까지, 물론 기획(?)은 언니가 해서 난 힘만 쓰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정성을 들인 만큼 김치가 딱 맛있게 나오는것도 아니고, 젓갈과 다른 재료들의 미묘한 조합으로 인해 김장이 망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맛까지 어떻게 예측하고 대비한단 말인가. 김장이 능숙하지 않은 우리는(언니는 그나마 능숙하지만) 소의 간을 보고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저런 재료들을 더 추가했다. 결론적으로는 맛있었지만 그렇다고 또 막 너무 맛있고 이런것도 아니고 여튼 어려웠다. 회사에서 정량화된 김치를 만들어두면 그걸 사 먹는게 훨씬 편하긴 한데 그렇다고 김장을 안하고 기성품에만 의존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씁쓸한 면이 있고... 어렵다.
4.
갑자기 새로운 웹툰을 보기 시작해서 정주행했는데 이게 나온지 꽤 된 웹툰이라 정서나 분위기가 살짝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래봤자 5년전일텐데 그럼에도 인공지능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배경이 얼마나 친근해 보이던지. 그러다가 문득 내가 14년정도 전쯤에 출판사 다닐때의 일이 떠올랐다. 딱히 행복한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뭐든 해보려는 마음이어서 의욕이 있었고 무엇보다 (간지러운 말이지만)희망이라는게 있었다. 목표와 꿈이 있던 그 시절, 특히 아침일찍 회사 근처 카페에서 2천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먹는걸 좋아했다.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칠해진 찻집은 컵도 예뻤던 기억이 난다. 아침일찍 그곳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는 다이어리에 끄적대던 기억은 다른건 모르겠고 의욕을 북돋아주는 그런 기억이었지.
그러다 문득 그때처럼 살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던 기분은, 그 마음가짐은 계속 안고 살아도 되는거 아닐까. 예전에 언젠가 TV에 니키 리가 어느 연대의 미국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아, 꼭 지금을 살아야하는건 아니구나. 지금을 좋아해야하는건 아니고 어느 한 시대를 좋아해도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었는데, 이게 기분과 마음가짐에도 적용되는게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20대의 기분으로 살면 안된다고, 그때의 호기로운 태도는 버려야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던것 같다. 그러면서 늘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하는 것처럼, 그 나이대가 되면 나이에 맞게 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웃긴 일이다. 나의 취향이라는 것은 죽을때 찾는것도 아니고 10대고 20대고 30대고 어느때나 찾을 수 있는 건데, 그게 좋았다면 그게 내 취향이잖아. 아침일찍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다이어리를 끄적일때의 그 희망차고 꿈으로 가득했던 기분으로 살면 왜 안되는 거지? 의문이 들었고 지금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명분도 설득력도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바로 20대 후반의 기분으로 살아가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때 꿈꾸던것을 계속 해나가자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상하게, 묘하게 위로가 되고 힘이 났다. 어쩌면 나는 시간에서 얻은 좋은것들은 갖다 내버리고 껍데기만 끌어안고 있었던 걸까. 다른 시간에 좋았던것도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