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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Oct 16. 2023

귤이 익어가는 가을의 제주



주말이면 늘 게을러집니다. 그냥 온전히 게으르면 괜찮으련만, 해야할 과제를 잔뜩 앞두고 '해야하는데'를 연발하며 게으름을 피우니 이도저도 얻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얻습니다. 이럴때는 얼른 씻고 밖으로 나가는게 최고입니다.


일이 많은 탓에 주말에도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합니다. 다행히 회사는 집과 가까워서, 20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만큼 하고 집에 가자는 생각과, 내일에 맡겨두고 대충하고 가자는 생각이 또 충돌합니다. 그러다 2시간쯤 일했을 때, 서귀포에 사는 나이차 많은 친구가 자신의 농장에 열린 구아바를 자랑합니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다 그만두고 싶어지더군요. 허락을 구하고  놀러가기로 합니다.


구아바라고 합니다. 먹어보니 시더군요


서귀포까지 빠르게 가는 급행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큰 길이 아닌, 좁은 마을길을 따라 친구네 농장을 찾아갑니다. 10월 제주의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고, 햇살은 적당히 뜨거웠습니다. 분명 가을인데 여름도 가을도 아닌것 같은 기분은 여전히 파릇파릇한 잎사귀들 때문입니다. 제주에 온지 이제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사시사철 푸른 나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습니다. 제주는 언제나 육지의 봄 여름 가을을 품고 있는 기분입니다.  봄에 낙엽이 떨어지고, 가을에 새순이 돋아나니 계절의 편차가 선명한 육지와는 아주 다른 세상입니다.




버스를 내려 20분 정도를 고즈넉한 마을길을 걸어갑니다. 온 사방이 귤밭으로 가득합니다. 똑딱이는 가위소리가 작지만 경쾌하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눈을 더 높이 들어 위를 쳐다보면 가을하늘 아래 우뚝솟은 한라산도 보입니다. 육지든 제주든 시골길은 언제나 정겹고 편안해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동영상도 몇 초 정도 찍어둡니다. 안타깝게도 휴대폰은 제주의 가을을, 바람을, 그 흔들림을 온전히 담지 못합니다. 아쉽지만 훗날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친구는 나를 기다리며 귤을 선별하고 있었습니다. 한봉지쯤 얻으려 온건데, 택배를 보내준다며 두 박스 정도 준비해 뒀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신 귤이 맛이 없을거라며 투덜댑니다. 육지에서 먹었던 그 어떤 귤보다 맛있었다 칭찬해도, 칭찬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괜스레 툴툴거립니다. 저는 그 마음이, 좋은 귤을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이라는 걸 압니다. 좋은 귤을 주면서도 혹여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의 표현이라는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쩌다 제주까지 유배와서 이렇게 좋은 친구를 얻은 걸까요. 육지에 가서도 이 친구를 보기 위해 이따금씩 제주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정많고 따뜻한 친구입니다.



귤을 얻고 가까운 카페에 가서 남은 달과 내년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을 다 지키진 않지만, 계획은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습니다. 다는 못해도 얼추 50%정도만 해도 이익입니다. 늘 하고 싶은게 바뀌는 저로서는 큰 줄기를 잡아놓기만 해도 쉽게 길을 잃지 않는것 같습니다. 2021년에 세워둔 5개년 계획만 봐도, 그 계획대로 된 것들이 꽤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것을 아는게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됩니다.


제주에 온지 1년 9개월, 육지에서의 헐떡이던 삶을 조금씩, 천천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높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도, 남들이 하는 것을 다 하고 싶은 욕망도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조급한 성격은 그대로지만, 많은 것을 내려놓으며 편안해지고 있습니다. 앞만보며 달릴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그때는 아무리해도 불가능한 것들이 조금씩 이뤄지는것을 보며 내려놓음이 어떤것인지 차근차근 배워가고 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뜨거움이 가라앉은 가을을 보며 어떻게 나이들어야 할지 어렴풋하게 가늠해가고 있습니다.



한낮의 열기보다 서산의 노을이 더 아름답듯, 어쩌면 뜨거운 젊은날보다 서서히 편안해지는 나이듦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헐떡이며 갖지 못해 안달나지 않는 지금이, 어쩌면 내 인생의 진짜 황금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이 보면 "젊은 녀석이 별 소리를 다한다"고 하겠지만, 치기어린 날들을 지나온 저는 정말로 훨씬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치열하게 방황하고 욕망하고 좌절한 모든 날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남은 가을도 계속 편안하고 고즈넉하길 바랍니다. 겨울의 제주에 다시 한번 큰 눈이 내려 눈발 아래로 꿋꿋이 서 있는 하귤을 보고 싶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약간의 설렘이 함께하는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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