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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May 12. 2024

여전히 심란한 마음으로 호캉스


커튼을 조심스레 열어젖히니 창밖 가득 옅은 감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도, 바로 앞에 보이는 가든도 이제 막 잠에서 깬 아이처럼 아침을 맞을 준비를 했다. 눈부신 빛이 세상을 뒤덮기 전의 고요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설렌다. 첫번째 휴식으로 택한건 제주에 있는 브랜드 호텔에서의 호캉스. 하지만 내 마음은 마냥 좋지만은 않다. 간밤에 꾼 꿈은 가뜩이나 변덕이 죽끓듯하는 내 마음에 더 심란한 불안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꿈에서 나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소속이 없다는 허전함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제 본격적인 전업작가로 평가를 받게 될게 두려웠거나, 혹은 둘다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고 해도, 지금 이 상태로는 달라질게 없다는걸 알고 있다. 게다가 지금 직장생활을 한다면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웹소설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도 해보기 전에 도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퇴사한 지 꼭 2주가 된 지금,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던 ‘전업작가로서 본격적인 웹소설 쓰기’의 완벽한 조건이 주어졌건만 다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평소 도망치는 걸 적극 권장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도망가려는 자아의 멱살을 쥐고 뺨을 올리친다. 평생 이 순간을 꿈꿔 와놓고 이제와서 비겁하게 뒷걸음질 치는 나를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잘 해낼 자신이 없다고,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는게 두렵다고 엉엉우는 나약한 나와 망해도 최선을 다하라고 윽박지르는 철인같은 내가 서로 싸운다. 


호캉스를 와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푹신한 침대 위에서 흰 이불을 바스락거리던 나는 방안에 혼자 누워 적막을 느낀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생활과 뒤섞여 알아볼 수 없던 마음이 낯선 곳에 오니 새로 단장한 호텔처럼 깔끔해진다. 명확하고 또렷한 대립. 숨을 곳 없이 덩그러니 놓여진 벌레처럼, 나약한 마음은 당황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끌어온다. 결국 내가 ‘철인같은 나’의 손을 들어주자 그는 ‘나약한 나’를 망설임 없이 짓밟는다. 커튼을 더 활짝 열어젖힌 나는 어느새 더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해를 맞이하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아침 일찍 조식을 먹으러 가니 국적이 다양한 음식들이 깔끔하게 줄지어 서 있다. 즉석에서 요리해주는 오믈렛과 쌀국수까지 받고는 정갈한 마음으로 한술 뜬다. 집과 차로 30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마치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에 간 것처럼 낯설다. 주변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말소리를 들어보니 대부분 서울 사람들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 여행온 그들의 무리 속에서, 나는 되레 제주가 아닌 것 같은 낯섦을 느낀다. 그 분위기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전문가의 솜씨가 만들어 냈을 완벽한 비율의 음식들을 차례차례 맛보며 배를 채워나간다. 평소 즐길 수 없는 사치스러운 기회가 아까워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음식을 구겨 넣었다. 과식을 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좋았다. 



바다 앞에 덩그러니 놓인 카페가 내 마음을 끌었다. 조금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 유채꿀이 들어가 있다는 독특한 이름의 커피를 주문한다. 큰 통유리창 앞에 놓인 커피와 그걸 한 모금씩 홀짝이는 나는 평소 읽고 싶었던 책에 눈을 돌리고는 찬찬히 읽어 나간다. 하지만 금세 머리가 어지러워져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짙은 파랑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바다. 그 쨍한색이 괜히 외롭다. 왜일까. 평소에는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바다를 볼 때면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허전해진다. 직장이라는 울타리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없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독립.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치르는 스스로의 성인식을 앞두고 저 바다만큼이나 마음이 출렁인다.


편안하게 즐길 줄 알았던 호캉스가 어쩐지 혼자 극기를 기르는 셀프 수련원이 되어버렸다. 첫날은 유튜브나 보며 깔깔거리고 잠들었지만, 그런 꿈을 꾸고 나서부터는 거대한 물음이 나를 뒤덮었다. ‘괜찮아? 정말 괜찮겠어?’ 그 물음은, 실패한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처절한 불안이 만들어 낸 동동거리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고 충분히 결심을 했던 일이니 손을 들어 울먹이는 마음을 토닥인다. 평온하고 사치스러워 보이는 겉과 달리, 나의 호캉스는 치열하고 힘든 내적 싸움을 해 나가는 시간이 되었다. 


집안의 막내로 살며 항상 어리광을 부리며 살아온 내가, 그 누구보다 단단하지 못한 내가 이 길을 잘 헤쳐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인생의 의미가 내 삶의 방향 따위를 생각해 보았지만 무엇이 진짜인지, 답이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답 없는 인생을 그냥 앞만보고 걸어가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위안을 얻으며 심장을 꽉 조이는 불안을 움켜쥐고 한발씩 걸어가기로 한다.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분명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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