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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여름 Jul 18. 2024

텃밭농사의 기쁨과 슬픔

처음 이 매거진을 시작했을때,  퇴사후의 휴식과 프리랜서의 삶으로 가는 과정을 담으려 했다. 당시 회사를 그만둔다는게 나름 심란했고, 또 제대로 쉬는 나를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에. 하지만 퇴사 3개월로 접어드는 지금, 어쩐지 나의 삶은 점점 '텃밭농사 집착 광인'으로 돌입하고 있다.


퇴사 직후 누구나 맞닥들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강박, 돈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은 두달만에 스르륵 사라졌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다. 지난 회사 따위는 이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책 출간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텃밭에 가보니 무성히 자란 잡초와 그 속에서 주눅들어 있는 작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럴수가! 이렇게 쭈꾸리처럼 자라고 있었다니. 텃밭인 친구 집 앞마당과 근처의 귤밭은 집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걸리는 거리. 그 긴 거리를 핑계로 그동안 너무 소홀했다. 밭을 생각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는... 나는 역시 천상 농수저인것인가.


심지어 브런치북 프로젝트 당선자 컨셉사진도 저렇게 찍었다. 어쩐지 민망해서 얼굴은 가려줌


나의 무관심때문인지 능력부족 때문인지, 오랜만에 본 작물들은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다. 상추와 바질은 그럭저럭 자랐지만, 고추에는 계속 이상한 벌레가 붙어 있었다. 옥수수 꽃에도 응애가 가득 차 개미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토마토는 계속 크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두었고 들깨는 순을 제대로 안쳐서인지 키가 낮은 채로 잘 자라지 않았다. 


어쩐지 망한것 같은 방울 토마토... 그래도 몇개 따 먹었으니 됐다 

가벼운 치매로 물었던 말을 재차 물어보시는 친구의 할머니. 나는 할머니께 마당 텃밭을 내가 심었다고 자랑했다. 방금 물어본 것도 잊어버릴만큼 노쇠하신 할머니는 나의 자랑에 급! 또렷한 말투로 "농사를 잘못지었어"라고 대답하셨다.(이정도면 평소에 진짜 못 지었다고 생각하셨던거다.) 그렇구나. 내가 느끼는건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끼는 구나. 역시, 텃밭농사를 만만하게 봤던것 같다. 


사실 그럴만 했다. 타고난 농수저라는 자부심과 농사에 대한 나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사무직 일만 해온 터라 능력치는 볼 품이 없었던 것이다. 고향의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칡덩굴로 가득찬 밭에 대해 이것저것 여쭈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넌 못하니 그냥 포크레인 불러서 그 밭을 다 갈아 엎어라"는 것이었다. 텃밭 농사에 대해서도 아빠는 "네까짓게 그럴 능력이 있냐"며 비아냥 댔지만, 너무나 사실이어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역시. 부모는 자식을 가장 잘 안다. 


작물 하나하나에 대해 공부하고, 토양살균제라던가 농약을 조금씩 뿌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마음만 가득했지 자주 와보지 못했고 김도 매주지 않았다. 결국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 하지 않은 결과다. 실질적으로 수확한 농작물은 모종값도 나오지 않는 수준.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내 손에 쥐어진 신선한 방울토마토와 고추가 주는 만족감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망의 아니, 나의 로망이었던...



내 주먹보다 조금 큰 수박. 저 녀석을 보는 순간 내 텃밭 농사의 모든 애환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이런저런 농사를 많이 짓던 우리집은 유독 수박은 잘 안심었는데, 그래서 늘 수박이 자라는게 신기했다. 저 작은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큰 수박이 되다니,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내 가슴을 가득채운다. 친구는 "거름을 안해줘서 어차피 못자랄거예요."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잘 자라서 꼭 빨간 속을 보여주길 바란다.


아직 밭은 여유가 있고, 곧 가을 농사를 시작할 계절이 온다. 이제 할일이 많지도 않으니 가을 농사는 더 본격적으로 뛰어들어볼 생각이다. 농약은 안치겠지만, 친환경 농법같은거라도 찾아보고 벌레들을 퇴치해야지. 재밌다. 돈은 안돼지만 재밌는거 하는게 인생의 가장 큰 사치 아닌가? 나름 사치를 부리고 사는 지금을 잘 기록해둬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뤄두었던 철학 강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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