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철학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돈도 아니고, 봉사도 아닌데 자신이 하고 싶어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냐고. 그러면서 우리는 돈벌이만 일이라는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학에서도 자본에 팔릴만한 것만 배운다고. 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쉬면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연습이 안되어 있으니 할일도 없다고.
그때도 그 강의에 공감했지만 10년쯤 지나 회사를 그만두고 4개월쯤 쉬게 되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직장에 다닐때는 막연히 '놀면 행복할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놀게 되니 어떤게 잘 노는건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자동으로 머릿속에 '돈 되는 일'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당장 굶어 죽을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전처럼 돈에 허덕이며 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데도 마치 돈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임없이 돈에 대해 생각했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 되는 일이 뭔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10년 전 지하 강의실에서 들은, 늦은 밤이지만 열기로 가득찼던 그 때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그 철학자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지난 10년간 나는 어찌보면 세상의 기준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로스쿨 대신 좋아하는 분야를 택했고, 하기 싫은 분야의 일을 꾸역꾸역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는 길을 택한것도 맞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지난 10년간 일상을 향유하는 삶을 살아오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와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시간이 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꿈꿔온 시간인가? 하지만 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아 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그냥' 심고 싶어서 심은 모종들이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며 말로 만족스럽고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마트에서 1분이면 살 수 있지만, 어떤건 차라리 사 먹는게 싸게 먹히지만 그럼에도 돈과는 바꿀 수 없는 또 다른 색깔의 기쁨이 있다는걸 알게 됐다. '돈은 안되지만 즐거운 일'의 첫 단추를 끼워넣은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가성비, 즉 노동시간과 강도에 대비해 얼마를 벌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거기에 더해 사회적 명성과 지위도 함께 고려됐다. 하지만 과로로 건강을 해치면서, 더이상 먹고 살 걱정에 허덕일 필요가 없어지면서 '일'을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를 맞게 됐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건 '나다운 삶'을 찾는것만큼이나 막연하고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무채색같던 '일에 대한 태도'에 아주 조금씩, 다양한 색이 물들어 가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