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두 번째 대학생활
사람은 살면서 한 번쯤 생애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아직 삶을 그렇게 많이 살아본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은 두 번째 대학 시절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는데, 우리 학교는 문학 쪽에 있어서는 걸출한 인사를 많이 배출하기도 했고 명망이 있는 학교였다. 내가 이런 곳에 합격했다니, 처음 합격 문자를 받은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그때 당시 가장 좋아했던 연예인의 공연을 보러 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의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던 그날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처음 학교에 와서 생각한 것은, 이건 진짜다! 였다. 담배와 막걸리를 두고 문학과 나라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진짜' 선배들을 만나고, 전쟁처럼 수강신청을 하고, '논스톱'에서나 봤었던 즐거운 동아리 생활과 과 생활이 펼쳐졌다. 불 꺼진 교정 잔디밭에서 CC였던 남자친구가 기타 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불러 주었고, 지적으로 거의 최상의 레벨에 도달해 있는 교수님이 내 인식의 지평을 매일같이 넓혀 주었으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스터디를 만들어 시와 문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수준 높은 이야기를 했다.
시험기간이면 과방에서 떡볶이를 시켜먹으며 밤새 공부를 하기도 했고, 축제 기간엔 교수님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으며 수없이 간 엠티에서는 간질간질한 사이의 남자애와 몰래 슬쩍 빠져나와 손이 닿을 듯 말 듯 애매한 공기를 즐기며 산책을 했다. 역시나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에 대해 접하는 것은 매일이 새로웠다. 배우는 것, 경험하는 것 모두 뇌세포 하나하나를 매일 죽이고 새로 탄생시키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명징하고 동시에 가슴을 절이는 것들이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알았던 것 같다.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구나, 지금이 평생을 그리워하며 곱씹게 될 그 시기이구나 했던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렇게까지 확실한 감각은 대부분 틀리지 않는다.
첫 번째 회사생활
대학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는 여러 번 했지만, 사무보조를 제외하고 진짜 사원으로서 일해본 것은 대학 졸업 이후가 처음이었다. 그 회사는 나름 이름 있는 중견급이었는데, 향후 회사 짬이 좀 차고 나서야 눈치챈 거지만 그 부서는 그야말로 '핫바지들의 섬'이었다.
사내 정치질에 실패해 쫓기듯 새로 만들어진 부서에 유배된 부장, 자기 없으면 이 부서 안 돌아가는 줄 알고 모든 걸 지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여자 대리, 그 대리가 제일 좋아하는 (왜 학창 시절에 일진 여자애가 자기 수준에 맞는 친구 한 명 데리고 다니듯이) 사원 하나, 정직원 안 시켜준다고 오후 1시에 출근하며 시위하는 사원 하나, 나이가 부장이랑 동갑인데도 여적 대리를 달고 있는 심하게 모자란 듯한 중년 남자 한 명에 계약직 신입 세 명… 그야말로 핫바지 어벤저스였다.
특히 마빈 박사처럼 생긴 여자 대리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인성도 성격도 가장 최악이었는데, 교묘한 정치질과 부풀리기로 본인의 능력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그것을 권력 삼아 하루에 2시간씩 자리를 비우거나 업무 중에 네일을 받으러 가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지맘대로 회사를 주무르고 있었다. (내가 퇴사한 뒤로 인턴들의 성과를 본인 것처럼 가로챈 사건이 터졌는데, 그걸 듣고 나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왠지 딱 그 정도의 치졸함과 무지함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회사에서는 매일 회사가 본인의 능력을 몰라준다며, 회사가 나 없으면 안 돌아가는데 왜 이러냐며 답답해했지만 솔직히 퇴사하고 나니까 보였다. 그냥 본인 능력이 거기까지고, 여기선 부풀리기에 성공했으나 더 좋은 회사를 운 좋게 가더라도 그것이 탄로 날 것임을 본인도 알았던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까지 정치질에 열을 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첫 회사생활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나인 투 식스라던 공고와 달리 입사하자마자 오후 1시부터 10시로 변경된 근무 시간, 우리 회사는 다 정규직 전환시켜주기 때문에 계약직도 정규직이나 다름없다던 X소리와 함께 난데없는 계약직 선언, 두 명이서 해도 빠듯할 것 같은 살인적인 업무분장까지. 게다가 사수는 계속해서 내 모니터를 훔쳐봤고, 매일 입고 다니는 옷에선 이상야릇한 개 비린내 같은 게 났다. (냄새에 민감한 나는 사수가 몰래 몸을 기울여 곁눈으로 모니터를 훔쳐볼 때 냄새로 그것을 알아채곤 했다)
그래도 나름 센스가 있어서인지,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빠르게 업무의 로직을 이해하고 그것을 내 업무에 적용시켜 성과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 차에는 그 여자 대리의 성과를 뛰어넘어 버렸다. 무작정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 했고, 그래서 결국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가는 것도 모른 채.
나보고 머리가 좋네, 직급에 비해 질문의 수준이 높네 하며 추켜세워주던 그녀는 슬슬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내 성과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시하더니 대놓고 업무 배제를 시키기에 이른다. (이제 막 대학 졸업한 두 달 차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내 직속 사수와 대리까지 세명이었는데, 갑자기 메신저로 투다다다닥 하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대놓고 티 내더니 동시에 웃지를 않나, 티타임을 가지러 갔다 와서는 동시에 돌아와 갑자기 나에게 일을 마구 떠넘겼다.
좀 찐따 같았던 내 사수는 나를 갈구라는 명을 받았는지 갑자기, 진짜 리터럴리 갑자기 분기탱천하며 "아니 왜 일을 이따위로 하지? 초등학생이야?!!!"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 말을 하면서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를 보니 좀 안타깝기까지 했다. 사람들 앞에서 갈구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피식 웃음이 났다.
입사하자마자 본인보다 20살은 더 많은 남자 대리를 반말만 안 했지 대놓고 갈구는 장면을 목격했고, 모든 사원들이 뒷담화를 하면서 여기서 버티면 어딜 가든 버틸 수 있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회사라니. 게다가 일 잘한다고 별안간 시작된 텃세까지 모든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걸로 텃세를 부리는 상사, 무능력한 부서원들, 매일 옆자리에서 음침한 눈으로 내 모니터나 훔쳐보면서 개 비린내를 풍기는 사수, 입사 두 달 만에 알게 된 온갖 회사의 중상모략과 정치질,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엔 너무나 작고 소중하지도 않은 월급... 소위 말하는 '현타'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아, 이게 뭐지? 난 뭘 위해 여기서 인생을 월급과 바꾸고 있는 걸까? 난 더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살다간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술을 마시며 벌게진 얼굴로 대학시절의 추억을 단물 다 빠진 껌처럼 곱씹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퇴사를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