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장생활 험난기 -03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by 소낙


그렇게 막장인 회사를 다니면서도 당장에 떨치고 나오지 못한 이유는 꽤 여러가지였다. 이젠 나이도 꽤 있고, 어떤 일이든 힘들다고 바로 그만두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또 이미 친구들은 나만 빼고 각자 자기 힘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대학생활이란 건 "그런 좋은 때도 있었지 허허" 하며 회상하는 아득히 먼 옛날의 추억인 것 마냥 빠르게 직장인으로의 탈피를 마쳐가고 있었고, 엄마 역시 인서울 대학을 졸업한 내가, 그 영민하고 특출나던 내가 집구석 백수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티는 안 내도 서운한 기색을 보이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졸업해 보니 인서울 대학이란 건 이름만으론 아무것도 아니던데, 나이가 찼다 하더라도 모두 분연히 일어나 직장인이 되고 자기 몫을 하며 살아가는 건 아니던데 하는 말 따위는 꾸역꾸역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 나는 일이란 놈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비록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사표 하나쯤 품고 다니네, 필리핀 청부살인이 27만원이네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우스갯소리로 하기 마련이라지만 사실은 모두들 착실히 회사를 다니고, 이직과정이 확실히 완료되지 않으면 회사를 잘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일이란 건 나에게 그랬다. 여느 면접에서 대답했을 때 점수를 잘 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교과서적인 답변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워라밸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워크는 내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삶과 일을 분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회사생활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했다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생각보다 서로를 칼같이 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일은 차후의 삶에도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학생일 때 나는 학생이기에 공부를 했고, 직장인이기에 일을 했다. 설령 그것이 내가 원해서 주어진 삶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용기 있게 떨치고 나가 다른 타이틀을 따내지 못하면 직장인이라는 이름이 나를 규명하는 이상 하루에 8시간은 꼼짝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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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사람과 단 10분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데 만약 하루에 8시간을 너무 싫어하는 일을, 생각만 해도 싫어서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일을 억지로 견디고 퇴근 후의 삶에서 '라이프'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건 너무나 불쌍한 인생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무언가가 생존을 위해 억지로 억지로 참아내야 할 무언가가 되는 것은 정말 싫었다. 학생이 공부를 싫어하면 결국 학생이 아닌 삶을 살게 되듯이, 직장인이 자신의 일을 싫어하면 직장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워크고 라이프고 모든 밸런스가 무너져 내릴 것이 뻔했다.


나는 그 회사가 싫든 좋든 확실한 성과를 냈고, 입사 두달만에 사수의 성과 이상을 따라잡았으며 (누군가에게는 그 일이 입사 두달차가 해도 될 정도로 쉬운 일이라는 접근도 가능할 테다)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별로였지만 그건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고, 사내 정치질 따위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거였다.



재미가 없다.


일이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철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거 안다. 세상에 어떤 일을 해도 너무 재밌고 즐거울수만은 없다는 것 또한 안다. 하지만 이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내가 여기서 뭘 하는거지?'라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올 때, 그걸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 나가면서 나는 영혼이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성과가 나도 성취감 따윈 없었다. 내 존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스스로를 좀먹는다. 법정스님이 그런 말을 했었다. '왜 사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살아야 할 이유같은 건 없기 때문에 존재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그러면 쉽게 우울해진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존재에 대한 의심을 꾸준히 품고 있으니 당연히 우울해질 밖에.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을 규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여자친구 등 '관계'로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라는 사람을 이야기 할 때에, 생체적인 정보 외에 나를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그것은 내가 할 때 가슴이 뛰고 행복하고 다음날 눈 떴을 때 너무나 기대되는 것, 내 자아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 다시 말해 직업이었다.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의식주가 된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먹는 것은 숭고한 일이지만, 먹고살기만을 위해 매일매일 하루 8시간을 억지로 참아야 한다면 솔직히 말해 먹이를 위해 사냥을 하는 원시인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일을 하는 이유가 먹고사니즘보다는 더 우위에 있는 무언가여야만 한다. 문과라면 한 번쯤 다 들어 보았을 그 이름, 매슬로우도 욕구의 피라미드를 통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실현이라고. 반대로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이 일을 할 때 내가 온전히 나인 것 같아서'라면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곧 자아실현이 된다. 억지로 참을 필요도 없고, 내 천성에 맞게 자연스러우며 그래서 자연히 발전도 뒤따를 수 있는 일.


흔히 영감이나 자아실현 같은 단어는 꽤나 거창해 보여서, 예술가나 연예인쯤은 되어야 할 수 있는 것 같고 그렇다. 하지만 직장인들이라고 해서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물론 계속 말했듯 직업 외에서 그러한 수단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쉬운 자아실현 수단은 직업이었다. 업무에 재미를 느껴 그것을 통해 성과를 내고, 그 성과로 인해 자기효능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발전함으로 인해 커리어 역시 발전적으로 쌓여가는 이른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일.


그렇다면 직장인으로써, 직업인으로써 나의 커리어란 뭘까? 흔히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데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럼 내가 좋아하는 일은 또 뭘까? 그리고 그런 것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나의 경우는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찾을 수 있었다. 때로는 '존버'만이 답이 아닌 경우도 있다.



내맘대로 생각해본
직장인을 위한 체크리스트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내가 타고난 성정에 크게 반하지 않는 일이다. (EX. 천성적으로 덜렁대는 사람인데 꼼꼼함을 요하는 직업이라던지 하는 부분)

나는 이 분야에서 최고는 아니더라도 나만의 '맛'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분야에서 5년, 10년 경력을 쌓은 사람을 보며 '나도 저런 모습이 되고싶다'고 생각했다.

이 업계에서 일할 미래의 내 모습이 기대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출근이네'가 아니라 '오늘 할 일은 뭘까?' 라는 생각이 든다.

업무시간 이외에도 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것이 내 업무의 아이디어가 된다.

"OO씨야말로 그 분야의 전문가죠."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심장이 뛴다.

이 일을 할 때야말로 나는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

재미를 느낀다.

이 일을 안 하면 죽기 전에 떠올려 봤을 때 '후회할 일들 리스트'에 오를 것 같다.



모든 질문에 다 체크할 필요는 없지만, 대부분이 해당되지 않는다면 조금 문제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질문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었기에 가차없이 그 직장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만난 다음 직장에서 All Yes를 외치며, 진정으로 '천업'이란 무엇인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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