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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Sep 14. 2016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창비시선 - 400  박성우, 신용목 공편 | 창비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오랜만에 시집을 사서 시를 읽다.  


풀 비린내 푸릇푸릇한 젊은 스님은 / 법당 문 열어놓고 어디 가셨나 [운장암 / 공광규]


민박집 할매가 배앓이에 즉효라는 양귀비술을 한술 떠와 아이에게 먹이는 / 생소라 올라오는 밤이다  [그믐께 / 이세기]


이른 봄에 핀 / 한송이 꽃은 /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 피어 있느냐고 / 묻는 [한송이 꽃 / 도종환]

너를 영원히 사랑한 적이 있다  [31일, 2분 9초 / 김성대]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배교 / 조연호]


다시 시를 만나고 있다.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그중 몇 구절을 위와 같이 적어 본다. 내 모국어가 아직은 반갑다. 오래 잊은 친구를 신호등 건너편에서 만난 느낌이다. 파란불이다. 그 친구가 다가오고 있다. 반가워 잠시 선다. 웃음을 주고받고 악수한다. 아주 짧은 순간. 헤어지고 나는 다시 걷는다.


모국어는 모국이 애절할 때 읽히고 쓰인다. 식민지 조선 또는 반독재 시절, 모국이 아파할 때, 쓰리고 회복이 불가해 보일 때 혁명은 시에서 시작되고 언어는 가장 원초적인 모국어에서 출발한다. 양보도 타협도 없다. 산과 들, 강과 내 모두 단호한 한 음절이다.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 시는 가장 단순한 한 음절이고, 번역되면 사라지는 저녁 안개다.


두 언어가 부딪힐 때 시는 가장 강렬한 독기를 내뿜는다. 제국의 언어와 식민지 민중의 언어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침략과 억압은 민중의 가슴에 내리 꽂혀, 오래 잊혔던 모국어를 다시 환기시킨다. 빼앗긴 들에 봄을 오게 하는 것이 시인이고 그 시인의 시를 받아들여 봄을 되찾아 오게 하는 이가 민중이다. 봄은 모국어로 표현되어야 봄이다. 그 봄이 와야 진달래가 피고 또 진다.


따라서 시는 오래 잊히기도 한다. 아주 오래 잊힌다. 여러 언어가 혼재되어 있고 언어와 이미지, 영상이 모국어의 자리에 동등하게 앉아있을 때 시는 혁명성을 잊어버리고 오락이 되고 농담이 된다. 잠시 이미지와 겨뤄보지만 이내 밀리고 만다. 모국어는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음절의 강력한 발성으로 존재한다.


땅이 살아있다는 것은 봄이 되어야 안다. 시는 모국어가 필요한 시기에 다시 태어난다. 지금은 시의 시대가 아니다. 시는 잠들어 있다. 휴화산이다. 다시 분출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때는 온다. 너무 멀거나 또는 도적처럼 올뿐이다. 그리고 가끔 국지적으로 오기도 한다. 용산에서, 대추리에서, 강정마을에서, 밀양에서 그리고 성주에서 왔다가 지나간다.


짧은 순간 만나 눈빛 나누고 헤어진다. 살아있다면, 내가 아니라 모국어가, 살아있다면 시는 다시 분출한다. 모든 산과 강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민중을 살아 춤추게 한다. 다행히 한반도 저 땅 밑에는 시가 계속 끓어오르고 있다. 터질 날만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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