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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Jan 14. 2016

잃어버린 근대성들

중국, 베트남, 한국 그리고 세계사의 위험성.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저/민병희 역


 읽고 나니 제목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어 버린  근대성들!!  ‘근대성’이 아시아에서 실종되었다고, 아니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고 여기저기서 하도 떠들어 대니까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중국, 베트남, 한국으로 ‘근대성’을 찾으러 나섰다. 우선 근대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 자본주의자들 및 그들과 연계된 산업과 과학부문만이 근대성의 유일한 창출자라고 보는 식의, 실질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세계사를 자본주의의 역사로만 축소시키는 접근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제대로 된 진입 전략을 찾을 수없을 것이다. 8 “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서구식 기준으로 봤을 때 “ 근대성 = 자본주의 “ 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아시아에서는 ‘근대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고 주장된다. 저자는 이런 분류에 대해 저항한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사람들에게서 ‘근대성’을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획일적으로 ‘전통에 얽매인 사람’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근대’는 ‘합리화의 과정’이고


“ 그 합리화 과정은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아주 다양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으며 서로 별개의 것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본주의 또는 산업화의 성장과 같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필수적이라 여겨졌던 획기적 사건들과도 전혀 무관하게 발생했다 23 “ 


 그 사례로 저자가 상정한 것이 관료제였다. 세습이 아니라 능력에 의해, 과거 시험과 같이 능력에 의해 관료를 충원하는 시스템이 시작된 것은 아시아의 세나라 중국, 베트남, 한국이었다. 아직도   합리적 관료 충원 시스템이 부재한 서구즉, 봉건적 체제 내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이어받는 귀족 계급들이 정치와 행정을 담당하는 시대에 이미 아시아에서는 ‘합리화 과정’이 체계적으로 성립되었고 활용됐다. ‘근대성’을 마르크스와 베버를 넘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유럽식 사고 프레임 안에서 분석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 시대, 상업자본의 축적, 부르주아지의 등장, 공장제 기계공업, 노동 계급의 탄생과  계급투쟁을 거치든 개신교와 자본주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합리적 권위에 기반을 둔 국가조직 (=  관료제)을 거치든 결국 그들은 서구 역사의 자장 안에서 태어났고 그 사상적 세례를 받고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근대성의 개념을 확대해야 한다. 서구식 개념에 얽매여 있는 한, 근대가 가져온 지금 여기에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아시아의 관료제는 종종 봉건적이라고 묘사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 만약 동아시아의 관료들이 정말 이런 의미에서 봉건적이었다면, 동아시아 정치이론에서 ‘고급’과 ‘하급’ 관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취약성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점으로 부각되곤 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이런 취약성은 봉건 왕조가 아니라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32 “   


 저자가 아시아를 탐방하면서 발견한 아시아 관료제의 여러 측면들, 그리고 그 관료제가 아시아 삼국에서 각각 어떻게 전개되었고 또 봉건 세력들과 어떻게 갈등을 겪었는지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개방적 태도에 호의가 느껴진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고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다.  일독하시라고!!!


읽으면서 언더라인 친 몇 부분 인용한다.


“ 청나라에서 열녀를 기리는 진기한 비석들이 놀라울 정도로 번성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열녀 예찬이 남성의 정치적 의무감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촉진제로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123 “


관료제 하에 관료들의 충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아니 기대할 수 없다. 관료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잠시 고대 삼대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적 충성, 삼강오륜이 필요하다. 베버의 기독교처럼 아시아 관료제에서도 ‘충성심의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다. 효도의 극대화였다.


“ 오규 소라이는 중국식 관료제에 대한 국외자인 일본인으로서 과거시험에 기반을 둔 관료제적 정체는 신분상승과 함께 이기심을 허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24 “


아시아에서 한자문화권이면서도 중국식 관료제를 채택하지 않은 일본에 대해 언급한 몇몇 분석들은 특히 흥미롭다


“ 국가가 대중의 복지를 챙기는 것이 매우 최근에야 생긴 정치적 관행이라고 보는 것은 단지 서구에 국한될 경우에만 옳은 이야기이다. 131 “


社倉 과 같은 빈민구제 시스템이 이미  오래전 관료제 아시아에서 있었다. ‘선량한’ 귀족의 자비심에만 의지해야 하는 유럽과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 익은 책 중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 다음으로 기분 좋게 읽은 책이다.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아시아의 재발견’ 식의 천박한 자기 위로가 아니다. 달리 생각하기의 진수를 봤다. 늘 의심과 회의가 일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알게 됐다. 역사는 근대보다 더 길고 심오하다. 서구식의 근대성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것 하나 만으로는 세상을  해석할 수도 없고 변혁시킬 수도 없다. 삼호선 알바라도 이것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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