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최근 법제처가 디지털 행정 선진화를 위한 의미 있는 법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8월 5일 게시되어 내달 19일까지 국민 의견 수렴 예정인 개정 법령은 4개 법률안과 13개 대통령안, 11개 부령안으로 총 28개에 달한다. 소관 부처는 기획재정부, 해양수산부, 금융위원회, 행정안전부, 국방부, 문화체육관광부, 통일부, 경찰청, 환경부, 공정거래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등 13개에 이른다. 네 개 법률안은 국세기본법, 국제항해선박 및 항만시설의 보안에 관한 법률, 담보부사채신탁법, 해상교통안전법 등이다. 이 법률들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본 비치 규정을 전자문서 열람으로 대체할 수 있게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기존에도 전자문서는 법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전자문서와 원본, 즉 디지털화된 전자문서와 종이로 된 원본 문서 사이에는 구별이 있었다. 전자문서를 규정한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 (약칭: 전자문서법) 제2조(정의)에서는 전자문서를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하여 전자적 형태로 작성·변환되거나 송신·수신 또는 저장된 정보”로 규정하고 있다. 또 같은 법 제4조(전자문서의 효력)에서는 전자문서가 전자적 형태로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법적 효력이 부인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전자문서 역시 법적 효력이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제 제4조 2항에서는 전자문서가 민법에서 말하는 ‘보증인의 기명날인 또는 서명이 있는 서면’과 같은 효력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료출처=법제처
전자문서법의 취지와 실제 행정업무에서 유통되고 있는 전자문서의 활용도를 보면 많은 경우 전자문서는 종이로 된 원본의 효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개별 법령 하나하나 잘 살펴보면 아직도 전자문서 대신 종이로 된 원본 문서를 요구하는 조항이 여러 곳 있다. 위에 언급된 ‘국제항해선박 및 항만시설의 보안에 관한 법률 제12조’를 살펴보자. 제12조 (국제선박보안증서의 교부 등) 4항에서는 “국제항해선박소유자는 국제선박보안증서 또는 임시국제선박보안증서의 원본을 해당 선박에 비치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담보부사채신탁법 제16조(신탁증서의 보존과 열람) 2항에서는 신탁증서 원본을 본점에 갖추어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제처가 정리하려는 것이 위에서 예로 둔 두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본과 전자문서의 관계다. 법령에서 규정한 기술적 인증 절차를 거친 전자문서를 원본으로 인정한다면 별문제 없지만, 현행 법령에 대한 유권 해석은 원본과 전자문서 사이에 어느 정도 구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종이로 된 원본 ‘국제선박보안증서’를 선박에 배치하지 않아 과태료가 부과되었을 경우 적절한 항변을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자적 형태로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자문서의 법적 효력이 부인되지 아니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사례로 든 두 법에서는 분명히 종이로 된 원본 문서를 요구하고 있지, 전자문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제처가 이번에 입법 예고하면서 발표한 안내문에는 원본과 전자문서 사이에 내재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일종의 불안감을 잠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안내문에서는 네 개 법률 개정 이유를 “법령상 원본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원본을 관행적으로 종이문서로 해석하는 혼란을 방지” 하기 위해 “법령상 원본의 개념에 전자문서도 포함됨을 명확히 하는 내용으로 「국세기본법」 등 4개 법률을 개정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국제선박보안증서 원본 배치 조항을 개정해 국제선박보안증서를 전자적 형태로 비치할 수 있도록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전자문서도 원본의 개념에 포함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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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처의 이런 발표는 분명 진일보한 정책이다. 많은 공문서가 전자적 형태로 생성, 유통, 보관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늦은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법제처가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원본에 대해서는 -위조 가능성이 농후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자문서보다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습속은 오래전부터 구축된 종이문서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된다. 책, 서류, 경전, 지폐 등 문명을 발전시켜 온 하드웨어 플랫폼은 종이였고 종이는 서고에서, 창고에서, 보관함에서 변하지 않은 채로 그 안에 새겨진 내용을 담보하고 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반면 전자문서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불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자문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기술적 프로세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소수 전문가뿐이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국가를, 금융기관을, 교육기관 등을 믿고 문서 생산을 의뢰하고 수용하고 활용한다. 이 전자문서가 위조되었는지 또는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법제처의 이런 결정이 늦어진 사회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심리적 저항을 약화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전자문서가 별문제 없이 유통되면서 법제처는 그 시기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개정으로 전자문서가 원본에 포함되면서 우리는 종이 없는 세상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