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가 던진 공영성의 질문: 안테나에서 플랫폼으로

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by 김홍열

영국 공영방송 BBC가 2035년을 기점으로 지상파 방송 송출을 종료하고, 인터넷 기반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퍼스트’ 전략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송출 방식 변경이 아니라, 공영방송이 의존해 온 기술적·제도적 토대 자체를 재구성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BBC는 유튜브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뉴스, 주요 프로그램, 어린이·청소년 콘텐츠까지 포괄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와 규제 당국 역시 공공 주파수를 활용한 지상파TV 운영이 사회적 비용 대비 효율성이 낮아졌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광대역 인터넷 보급률의 급상승, 시청 행태의 급격한 변화가 정책 판단의 배경이다.


사실 지상파 방송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유튜브를 포함한 디지털 플랫폼을 보조 채널로 활용해 왔다. 전통적 안테나 네트워크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젊은 시청자와 글로벌 이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스위스는 2019년 말 유럽 국가 중 최초로 지상파 디지털TV 방송을 전면 중단하고 IPTV 및 케이블 채널 등을 이용했다. 벨기에의 공영방송 VRT 역시 2018년 지상파 송출을 종료하고 온라인과 케이블 중심 체제로 이동했다. 이들 사례는 지상파 중단이 기술적 무모함이 아니라 계산된 선택임을 보여준다. 공영방송은 이미 플랫폼 다중화 시대에 들어섰고, 지상파는 그중 하나의 옵션에 불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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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영방송 BBC 런던 본사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ABC, NBC, CBS, Fox 등 주요 방송사는 이미 수년 전부터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지상파 방송을 송출해 왔다. 이는 지상파를 유지한 채 플랫폼을 확장하는 병행 전략이었다. 시청자는 여전히 안테나나 케이블로 방송을 볼 수 있었고, 동시에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통해 동일한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모델은 전통 방송의 점진적 적응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심은 점차 지상파에서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시청 데이터, 광고 모델, 이용자 경험은 모두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됐다. 지상파는 더 이상 핵심 인프라가 아니라, 과도기적 유산에 가까워졌다. BBC는 바로 이 과도기를 생략하고 ‘완전한 이동’을 선택한 셈이다.


BBC 결정의 가장 급진적인 지점은 지상파 송출을 부분 유지하거나 병행하지 않고, 완전히 포기한다는 데 있다. 이는 기존 방송사들이 선택해 온 점진적 전환과 분명히 구별된다. BBC는 유튜브를 단순한 유통 창구가 아니라, 공영 콘텐츠가 존재하는 1차 공간으로 설정했다. 이는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기술 네트워크 위에서 재정의하겠다는 의미다. 더 이상 공영성은 특정 주파수나 채널 번호에 묶이지 않는다. 대신 알고리즘, 플랫폼 규칙, 글로벌 이용 환경과 끊임없이 협상해야 하는 조건이 남는다. BBC는 이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지상파에 머무는 것이 더 큰 위험이라고 판단했다. ‘남아 있음’보다 ‘이동함’이 생존 전략이 된 것이다.


지상파 방송은 역사적으로 국가의 통제와 지휘 아래 운영돼 왔다. 주파수는 희소 자원이었고, 허가제는 이를 관리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공영방송은 이 질서 속에서 공공성과 국가성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러나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 이 구조는 점점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정보의 흐름은 국경을 넘고, 이용자는 특정 국가의 방송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다. 국가 단위의 주파수 관리 체계는 플랫폼 기반 미디어 환경과 구조적으로 충돌한다. 공영방송이 국가 안에만 머물수록 영향력은 축소된다. BBC의 선택은 공영방송이 국가 중심 미디어 체제에서 탈주하려는 시도다. 이는 통제의 해체를 통한 공공성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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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홈페이지 갈무리


기술적으로 보더라도 지상파 송출은 점점 비생산적이고 폐쇄적인 플랫폼이 되고 있다. 송신소 설치와 유지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이용자 감소와 정비례하지 않는다. 반면 인터넷 기반 플랫폼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비용 대비 효율을 극대화한다. 지상파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볼 때 의미가 있지만, 오늘날 시청은 개인화·분산화되고 있다. 이 환경에서 지상파는 도구적 합리성을 상실한다. 더구나 업데이트와 실험이 느린 구조는 미디어 혁신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BBC가 보기에 지상파는 더 이상 공공성을 실현하는 최적의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공공 자원을 소모하는 낡은 인프라에 가깝다.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BBC의 지상파 중단 결정은 단순한 방송 기술 변화가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공영성'의 위치를 재정의하는 사건이다. 공영방송은 더 이상 어디에서 송출하느냐로 정의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접근할 수 있는가다. 이는 공영성을 채널이 아닌 접근권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동시에 플랫폼 의존이 가져올 새로운 권력 문제도 피할 수 없다. 수익을 위한 알고리즘 속에서 공영성은 끊임없이 시험받게 된다. 따라서 BBC의 선택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안테나에 머무는 공영성은 이미 과거의 모델이라는 점이다. 이제 공영방송은 새롭게 설계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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