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관한 에세이 3
당연히 언젠가는 변한다. 곱게 늙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생불사의 욕망이야 누구에게라도 있지만 일부 무지한 정신착란자를 제외하고는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부모의 모습에서, 지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에서,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우리는 순간마다 계절마다 보고, 느끼고 있다.
시간이 변화를 조금씩 가져온다. 아니 시간만이 아니다. 변화는 도처에서 이루어진다. 그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이다. 얼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굴 역시 변한다. 그러나 시간만이 주체는 아니다. 변화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내면의 여유가 부드러운 표정을 만든다. 시간과 자신의 삶이 얼굴을 변화시킨다.
문제는 그 기간이 길고 내 젊음은 짧다고 느끼는 순간에 발생한다. 시장과 자본은 시간을 상품화해서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시간은 흐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의 젊음 역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의 이 순간이 당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이후의 삶은 지금 젊은 시절의 부록일 뿐이다.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라고 끊임없이 광고하고 있다.
종말을 상정하고 그 종말에 가까이 갈수록 삶은 천박해지고 구차해진다는 자본주의의 주장이 지금 이 순간을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하고 훼방하고 조급증을 선사해 지금 이 시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성형을 해서 지금 이 순간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절정은 순간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광고한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일 때부터 연로한 노년의 이루기까지 시기마다, 순간마다 다 소중하고 중요하다. 중요한 어느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오랜 기간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오랜 기간 동안, 상품 소비가 인생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탄생의 기쁨과 젊은 노동력, 노인의 지혜가 다 필요하고 중요했다.
구매력에 의해 인간이 평가받기 시작하면서 시간은 자본에 의해 분할되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물건은 ‘제 때’ 팔려야 한다. 느긋하게 긴 시간은 반자본주의적이다. 당신의 내일은 불안하다고 주장해야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 포만감을 찾게 된다. 내일도 충분히 예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내일의 아름다움은 오늘 투자의 결과다, 라고 떠들어야 한다.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시간은 더 세분화된다. 내일이 아니라 한 시간 후의 당신의 욕망이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세뇌시킨다. 그리고 세뇌당한다. 여기에 비극이 탄생한다. 물리적 생존기간은 이전보다 더 길어졌는데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짧게 살고 있다. 더 불안하게 더 강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