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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Feb 22. 2016

인간은 왜 가상공간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할까

가상공간은 네트워크를 타고 과거와 미래 속으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와 잊혀질 권리 사이에는 언뜻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잊혀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런 정서를 쉽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문학적 수사가 필요하거나 영화적 문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너무 미묘해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 자체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 또 그렇게 살겠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해보자.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와 잊혀질 권리는 그 출발점이 다르다.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는 개인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최종 귀착지 역시 개인에게로 환원된다. 반면 잊혀질 권리의 경우 출발점은 개인일 수 있지만 사회적 경유지가 존재하고 귀착지 역시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둘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누구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 흔적은 공간에 남아있다. 오래 전부터 인간은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다. 낙서는 천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낙서의 주체에게는 자신의 분신일 수밖에 없다. 낙서를 다시 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 저기 빈 공간에 자신을 채워놓는 일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철학적 욕구에서 나온 행위다.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여러 공간에 많은 흔적을 남겨놓아야 한다. 공간은 일단 보이는 곳에 존재한다. 그 공간에 흔적을 남기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 계속 공간을 이동하다 보면 처음 공간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공간도 시야 너머로 사라지고 시간 역시 공간과 함께 흐르게 된다. 그러나 공간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그 공간에 남긴 흔적 역시 존재하고 있다. 다시 찾은 공간과 그 공간에 남겨진 자신의 흔적을 통해 인간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원초적 경험을 한다. 불멸과 영생에 대한 종교적 심성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공간이 존재하고 그 공간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은 호모 사피엔스의 중요한 본성이다.


공간은 가능한 한 다차원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다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앙코르 와트에 새겨진 낙서는 언제까지라도 존재하겠지만 현실의 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꿈에 보이는 아련한 옛 추억이 나를 지난 시간으로 되돌려 놓을 수는 있겠지만 꿈 역시 의지대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구성된 근대적 공간은 흔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욕망을 단순 이원화시켰다. 눈에 보이는 현실 자본주의 공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공간으로 이원화시켜 존재의 불안감을 심층화시켰다. 인간은 늘 ‘현대’에 살았지만 ‘현대인의 고독’이 시작된 것은 공간이 이원화된 근대의 특징이다. 현대적 의미의 유물론적 인간관은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공간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의도가 유물론적 인간관이라면 자본주의 밖에서 자본주의 공간을 넘어서려는 욕구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공간은 고대의 신화적 공간과 근대의 물질적 공간을 동시에 초극하는 공간이고 일시적인 물질성 또는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서 둘 다 흡수하여야 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해야 하고 만질 수 없지만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공간이 현실화되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샤먼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일상적으로 실현 가능한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샤먼을 통해서만 전달되던 내 메시지가 도처에 있는 네트워크를 타고 누구에게라도 전달된다. 또 내 메시지 박스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따라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온 메시지로 가득하다. 아이디로 서로를 확인하고, 친밀함은 비접촉적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늘 같은 공간 안에 있고 그 공간 안에서 호흡하고 있다.


그 공간이 가상공간이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낸다. 불멸과 영생에 대한 욕망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현존하는 그 욕망들이 가상공간을 통해 실존하는 욕망으로 재구성된다. 가상공간은 공간적 속성보다는 시간적 속성이 더 강하다. 페이스북은 몇 년 전 내가 올린 사진을 오늘 다시 보여주면서 내가 또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현실화된 과거에도 있었고 당연히 미래화된 현실에도 존재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 내가 남긴 흔적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공간을 초월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활성화시킨다.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주기적으로 또는 돌발적으로 확인된다면 우리는 가상공간에서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가상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물론 그 공간은 개방적 가상공간이어야 한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이후 모든 흔적은 영원에 대한 그리움에서 출발한다. 죽음을 의식할 줄 아는 호모 사피엔스의 당연한 귀결이다. 공간이 새로 나타날수록 욕망의 흔적 역시 재구성된다. 가상공간은 네트워크를 타고 과거와 미래 속으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그 네트워크에 우리의 여러 흔적들이 실려 있다. 그 흔적들은 어느 특정 노드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네트워크를 타고 시공간을 유영한다. 머무르고 흐르고 하면서 계속 윤회한다. 흔적을 남겨야만 네트워크를 따라 계속 우주적 시공간 안에 존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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