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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열 Feb 17. 2016

빅데이터 시대와 지식인의 종말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소명의식이 있을 수 없다


인터넷 발달 덕분에 모든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지만 뉴스의 대부분이 우울한 내용이라 답답하기만 하다. 사실 우울한 뉴스가 더 빨리 전파된다. 뉴스의 속성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 뉴스를 계속 접하다 보면 우리 주변이 온통 잿빛으로 물든 것 같아 산다는 것 자체가 부정적으로 여겨지게 된다.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불법 사실들이 보도되면 이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시대가 제대로 온 것 같아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뉴스가 이따금 보도되면 놀라기라도 할 텐데 너무 자주 보도되다 보니 이젠 무감각해지기까지 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부장판사 승진을 앞둔 대법원 판사가 “여성 판사들을 성추행해 내쫓겠다”는 발언을 해 대법원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조선일보 2015.11.13) 

새벽기도를 준비하며 10세 여아를 수 차례 성추행 한 목사에게 항소심에서도 중형이 선고됐다. 교회 집사들은 목사의 편을 들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터넷 헤롤드 10.16)

 

유흥주점에서 술 값으로 쓰는 등 국가 지원 연구비를 횡령한 대학 교수들이 무더기로 입건됐다.
(인터넷 중앙일보 2015.9.7)

이런 기사를 자주 접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범죄 자체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신분에 더 많이 눈길이 갈까. 조직 폭력배나 전과자, 사회적 부적응자 들이 같은 내용의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마 당연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분에 따른 범죄 발생률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어느 신분, 직업의 사람들이든 그들 중에 일정 비율의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 일반화될 것으로 보인다. 신분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의미로 각인되지 않는다. 신분은 없어지고 직업만 남게 된다. 특히 빅데이터 시대에 들어와서 지식을 무기로 지도적 역할을 해왔던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상은 점차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문자 해독은 아주 독특한 일이었다. 그것은 사명, 계시 또는 신에 의한 선택과 같은 의미로 유전되어 왔다. 표의문자는 물론 표음문자라 하더라도 문자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특수한 신분 안에서도 선택을 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한 왕조의 신비로운 탄생 설화에서부터 파란만장했던 투쟁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언까지 모두 적혀있는 오래된 문서를 아무나 열람해서는 결코 안 된다. 경전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와 법, 계시와 찬가가 모두 혼합되어 있는 경전을 아무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어려서부터  선택받고 오랜 시간 제대로 교육을 받은 선택된 소수만이 읽고 해석하고, 위로는 왕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줘야 하고 아래로는 ‘무지한’ 백성에게 교훈의 말씀을 던져 줘야 한다. 제사장, 판관, 예언자의 공통점은 단 하나, 비밀 코드 해독에 대한 독점권이었다. 문자가  독점화되던 시절에 문자 해독은 특수한 신분에게만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은 늘 절대적 진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회적 인식은 중세를 거쳐 근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유지됐다. 라틴어 성경이 일반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되고 근대 대중 소설들이  상품화되면서 문자 해독 인구는 늘어났지만 지식은 아직도 지식인의 소유물이었다. 문자 해독과 진리 탐구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장애물이 분명 존재했고 그 장애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학문적 도제 기간이 필요했다. 지식인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난 근대의 산물이다. 보편적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 분야의 전문성과 역사적 통찰력을 동시에 소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근대 이후 미래가 불투명할 때 이런 지식인들의 역할은 막중했고 특히 신생 독립국에서 이들의 역할에 따라 근대화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했다. 근대 지식인들은 고대 성직자와 유사한 의미로 사회적 진리의 담지자였다.


지식이 소수에게 독점될 수밖에 없고 지식의 정점을 진리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지식의 불가해성, 난해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전달 과정의 상대적 폐쇄성에 의존한다. 지식 전달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물질적 투자 등 여러 요소에 깊게 종속당한다. 이 과정에서 선택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런 선택 과정이 지식을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와 차별적으로 포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은밀한 전수 과정이 네트워크 시대에 들어와서는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지식 자체가 하나의 디지털 데이터로서 도처에 존재하게 되면서 지식은 무료 공개 시장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일회용 오락거리가 되었다. 당연히 특정 지식인에 대한 우리의 의존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다.


2016년 현재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공개된다는 것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의 '지식인들'은 이전과는 다른 일종의 자격증 소지자들이거나 또는 특정 직업군이다.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소명의식이 있을 수 없다. 우연히 어떤 계기가 되어 그 방면으로 공부를 하고 그 방면의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이다. 재판관은 신의 뜻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고, 목사는 시험 점수로 결정된다. 이제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은 없다. 다만 우리 의식이 늦게 변할 뿐이다. 성직자도 학자도 법관도 다  똑같은 욕망 덩어리라는 것을 아직은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이 디지털 시대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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