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는 신문을 배달한다.
가끔씩 그런 날이 있다. 그냥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 날들.
요 며칠이 그러했다. 나름 기대했던 일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고 일련의 슬픈 소식을 연달아 들었다. 누군가의 아픔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난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뒤척거리며 잠을 설쳤다. 숫자는 점점 다가왔지만 그건 점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의미함으로 변해갔다.
난 보통 할 일을 끝내고 잠을 3시쯤 잔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편이라 뭐라도 티를 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도 하고. 그렇게 깨어 있다 3시에서 3시 10분 사이가 되면 익숙한 발걸음이 아파트 복도에서 들리곤 한다. 일요일을 빼놓고 매일 같은 시간에 오셔서 신문을 놓고 가시는 신문 배달원님이 아침을 시작하시는 소리다.
다른 날과는 달리 그날은 배달원님이 오시는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 있었다. 이번달 말이면 재건축으로 집을 비워야 하기에 한번쯤 인사드리려던 참이었으니 지금쯤이면 딱 좋겠다 싶었다.
문을 열고 가로등 불빛 저 멀리 어두워져가는 아저씨를 불렀다.
이 시간에 누가 자기를 부르나 하는 표정으로 아저씨가 뒤를 돌아봤다.
아저씨께 다가갔다. 아저씨는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팔에는 오늘자 신문을 가득 끼고 계셨다.
"저.. 죄송한데 혹시 지금 일하시는 모습 제가 따라다니면서 지켜봐도 괜찮을까요?"
아저씨의 첫번째 반응은 너털웃음이었다. 잠시 허허 웃으시면서 무언가를 생각하시더니 선선히 마음이 그렇다면 한번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따라올 테면 따라와보라는 의미가 담뿍 담긴 속도로 아파트 이 라인 저 라인을 속보로 빠르게 걷기 시작하셨다. 중년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0대인 내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아저씨는 빨랐고, 신문을 넣는 정확도도 엄지를 척 치켜새울만큼 정확했다.
"내가 네 개 정도의 신문을 배달하는데, 간혹 잘못 배달하면 항의하시는 분들이 계셔. 우리집은 조0일보를 보는데 왜 한00를 주느냐 하고. 이거 생각해 보면 되게 웃긴데.. 그래서 더욱 조심하지."
아저씨는 이 아파트가 자신이 맡은 마지막 아파트라고 했다. 5도 언저리를 맴도는 추운 날이지만 땀에 한바탕 뒹군 아저씨의 얼굴 앞에 편의점에서 미리 사온 따뜻한 캔커피를 내밀었다.
아니, 물도 괜찮은데 커피를 주네? 허허..학생도 참! 그래도 분위기도 내고 좋구만.."
톡! 톡! 하고 캔커피 따는 소리가 동시에 나고 우리는 쓰고 단 커피를 목 안으로 꿀꺽꿀꺽 넘겼다.
"몇년째 이쪽 라인에서 신문을 돌리는데 나도 학생이 궁금했어. 뭘 하길래 불이 안 꺼지나..싶었었거든. 개인적으로 이 아파트는 오래 하기도 했고 최근에 지어져 호가 떨어져 있는 아파트보다 신문을 놓아두기 편하기도 해서 꽤나 애착이 있었는데. 모두 떠나고 곧 부서진다니 아쉽네."
"아, 저를 알고 계셨나요?"
"아니, 아파트 전체에 혼자 불이 켜진 창문을 누가 안 보겠어? 그나저나 학생은 볼 때마다 표정이 사뭇 진지하더군. 얼굴은 밝은 상인데 말이야. 근데 오늘은 왜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 무슨 일 있는 것 아닌가?"
"저..아저씨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후회되는 일은 없으셨나요? 이걸 못해줬다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셨다거나..."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것은 얄량한 자존심 때문에 끝내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후회야. 그땐 철없는 객기에 자주 싸우고, 후회할 말들을 쉽게 내뱉곤 했어.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더군. 그땐 정말 왜 그랬는지...나야 곧 갈 인생이라 이러지만 학생은 지금까지 산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야. 내 나이가 되면 떠나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보다 늘어나대. 예전에는 친구나 자식 녀석들의 결혼식 초대장을 많이 받았지만 요즘은 대부분 부고 소식이야.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나? 머리로는 아, 이 친구도 또 갔구나. 하곤 생각하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더군. 허허..사람이 참 재미있어..그렇게 장례식장에선 덤덤히 있다 혼자 화장실 안에서, 집에 돌아와서 나쁜 새끼.. 하고 울먹거리지. 왜, 이 아저씨가 우는 걸 생각하니 상상이 안 가나?"
아저씨는 그래도 나보다 조금 더 산 사람으로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언제 한번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분명 가족도 있겠고 친한 친구도 있겠지. 되도록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사람을 많이 만나기보단 그 시간에 학생이 생각하는 친구와 진심을 다해 시간을 보내. 요즘은 예전보다 연락하기 편해졌잖아? 자주 연락을 해. 힘들 때 힘이 되어줘. 사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동물이기에 뭘 해도 후회는 하겠지만 분명 덜 후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아, 그리고 말야. 아마 다시 본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같아서 하는 말이지만. 학생은 분명 멋진 어른이 될 거야. 그때 혹시라도 이 늙은이가 떠오르거든 이 새벽에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새벽 공기를 마셔봐. 날 생각할 정도면 어지간히 답답해서 뭘 해도 고민하는 것보다 낫겠지. 크! 커피 맛이 좋군. 이거 이름이 티.오.피. 탑이야 탑!"
막 던지는 아저씨의 유머에 실없게 피식 웃던 중 아저씨가 호들갑을 떨며 저 멀리 하늘을 가리켰다.
"학생, 저 하늘을 봐. 동이 곧 트겠구만! 오늘은 날이 맑아서 그런가 더 밝네. 내가 이 맛에 이 일을 한다니까."
점점 밝아지는 하늘은 붉은 기운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난 아저씨와 함께 빌딩숲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우린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며칠동안 가슴에서 웅어리졌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게워낸 기분이었다. 그렇게 난 지금 이 치열한 고3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