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황 Sep 27. 2016

잊혀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며

마치 강물처럼 그들은 흘러갔다.

한국에서 남쪽으로 1만㎞ 넘게 쭉 내려가 인도양 끝자락에 닿으면 퍼스라는 항구 도시가 있다.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서 한자릿수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이 도시의 허파인 킹스 파크에서 난 호주 전통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 청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퍼스의 한강 격인 유서 깊은 스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요즘 음악은 영 정이 들지 않는다며 어린 시절을 함께 한 80년대 음악을 연신 찬양하던 그는 말이 통하는 친구가 생겨 기쁜 눈치였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와 함께 음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네. 난 원래 이곳에서 1200㎞ 떨어진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큰 부족들과 함께 살았어. 아버지, 할아버지, 형들과 함께 넓고 넓은 숲과 사막을 뛰어다녔지. 낚싯대를 잡고 강에 던지면 백이면 백 물고기가 올라오는데 그 손맛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그랬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도시 생활도 나쁘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어.”


나는 그에게 반문했다.


“그럼 한번 시간 내서 그곳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때? 분명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은데.”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여기 왜 왔을 거라고 생각해?”



순간 정적이 흘렀고 그는 당황한 나를 바라보며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듯이 씩 웃었다.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그는 우리 앞에 보이는 끝없이 흘러가는 스완 강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난 이곳에 자주 올라오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 강 때문이야. 내가 살던 고향의 자그마한 냇물이 흘러 흘러 이 강이 되거든. 그리운 그곳에서부터 흘러온 물은 이곳에서 바닷물과 섞여 인도양으로 흘러들어가. 난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내 추억과 작별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본단다.”


그로부터 반년쯤 흐른 지난 봄, 나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었다. 관광지 명소가 되어 살아난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와 달리 점점 쇠락해 가고 있는 책방 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많은 언론들이 찾아왔지만 달라진 것도 별로 없고 할 이야기도 없다는 상인 분들을, 동행한 ‘설레어함’ 운영자와 함께 겨우겨우 설득해 인터뷰를 시작했다.


"옛날에는 학교가 전부 다 4대문 안에 있었어. 60년대엔 오후만 되면 교복 입고 대학 교재, 참고서 사러 온 학생들로 이 거리가 온통 다 까맸어. 그렇게 젊은이들이 많이 왔는데 지금은 아니야. 젊은 사람들이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젊은이들에게 특별하게 할 말은 없지만 굳이 말을 꺼내자면 사회가 발전하니 좋긴 한데 책을 보는 사람이 없어. 예를 들어 지하철을 한번 타봐. 다들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만 바라보지 아무도 책을 읽지 않아. 책 읽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 원시인 취급이더라고. 요즘엔 노인들도 책 안 읽고 스마트폰으로 고스톱 치고…"


씁쓸하다면 충분히 씁쓸한 인터뷰가 끝나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을 휘휘 둘러봤다. 책을 잡은 사람은 없었다. 헌책방 거리가 있는 동대문에서 신촌까지는 지하철로 20여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신촌에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지인을 기다리며 축제 현장을 둘러보노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불과 이십여분 왔을 뿐인데도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온 듯 그 변화는 컸다.


쌓인 책과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위안삼아 헌책방을 지키는 어르신들로부터 멀어져 이제 막 스무살 언저리 청춘들에게로, 한적하다 못해 정적이 흐르는 거리에서 발 내딛을 틈도 없을 만큼 복잡한 거리로 나는 나아갔다.


그때쯤일까. 반년 전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애버리진 청년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머릿속에선 물음이 맴돌았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작별해야만 하는 걸까. 미래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안녕, 노량진 (구)수산시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