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강물처럼 그들은 흘러갔다.
한국에서 남쪽으로 1만㎞ 넘게 쭉 내려가 인도양 끝자락에 닿으면 퍼스라는 항구 도시가 있다.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순위에서 한자릿수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이 도시의 허파인 킹스 파크에서 난 호주 전통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 청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퍼스의 한강 격인 유서 깊은 스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요즘 음악은 영 정이 들지 않는다며 어린 시절을 함께 한 80년대 음악을 연신 찬양하던 그는 말이 통하는 친구가 생겨 기쁜 눈치였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와 함께 음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네. 난 원래 이곳에서 1200㎞ 떨어진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큰 부족들과 함께 살았어. 아버지, 할아버지, 형들과 함께 넓고 넓은 숲과 사막을 뛰어다녔지. 낚싯대를 잡고 강에 던지면 백이면 백 물고기가 올라오는데 그 손맛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그랬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도시 생활도 나쁘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어.”
나는 그에게 반문했다.
“그럼 한번 시간 내서 그곳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때? 분명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은데.”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여기 왜 왔을 거라고 생각해?”
순간 정적이 흘렀고 그는 당황한 나를 바라보며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듯이 씩 웃었다.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그는 우리 앞에 보이는 끝없이 흘러가는 스완 강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난 이곳에 자주 올라오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 강 때문이야. 내가 살던 고향의 자그마한 냇물이 흘러 흘러 이 강이 되거든. 그리운 그곳에서부터 흘러온 물은 이곳에서 바닷물과 섞여 인도양으로 흘러들어가. 난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내 추억과 작별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본단다.”
그로부터 반년쯤 흐른 지난 봄, 나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었다. 관광지 명소가 되어 살아난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와 달리 점점 쇠락해 가고 있는 책방 거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많은 언론들이 찾아왔지만 달라진 것도 별로 없고 할 이야기도 없다는 상인 분들을, 동행한 ‘설레어함’ 운영자와 함께 겨우겨우 설득해 인터뷰를 시작했다.
"옛날에는 학교가 전부 다 4대문 안에 있었어. 60년대엔 오후만 되면 교복 입고 대학 교재, 참고서 사러 온 학생들로 이 거리가 온통 다 까맸어. 그렇게 젊은이들이 많이 왔는데 지금은 아니야. 젊은 사람들이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젊은이들에게 특별하게 할 말은 없지만 굳이 말을 꺼내자면 사회가 발전하니 좋긴 한데 책을 보는 사람이 없어. 예를 들어 지하철을 한번 타봐. 다들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만 바라보지 아무도 책을 읽지 않아. 책 읽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 원시인 취급이더라고. 요즘엔 노인들도 책 안 읽고 스마트폰으로 고스톱 치고…"
씁쓸하다면 충분히 씁쓸한 인터뷰가 끝나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을 휘휘 둘러봤다. 책을 잡은 사람은 없었다. 헌책방 거리가 있는 동대문에서 신촌까지는 지하철로 20여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신촌에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지인을 기다리며 축제 현장을 둘러보노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불과 이십여분 왔을 뿐인데도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온 듯 그 변화는 컸다.
쌓인 책과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위안삼아 헌책방을 지키는 어르신들로부터 멀어져 이제 막 스무살 언저리 청춘들에게로, 한적하다 못해 정적이 흐르는 거리에서 발 내딛을 틈도 없을 만큼 복잡한 거리로 나는 나아갔다.
그때쯤일까. 반년 전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애버리진 청년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머릿속에선 물음이 맴돌았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작별해야만 하는 걸까. 미래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