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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Apr 03. 2022

봄, 사랑, 벚꽃 그리고 첫연애

19살 첫 연애 이야기

 동아리 신입생 OT에서 만난 A는 막 전역한 복학생이었다. 갈색 배기바지에 베이지색 조끼, 주름이 많이 간 머플러를 두르고 구석에서 같은 처지의 복학생들과 무리 지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내가 그를 본 첫 모습이었다. 180센티가 넘는 키에 듬직한 몸을 가진 A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었는데도 그 모습이 19살 내 눈에는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커다란 키에 걸맞은 커다란 손을 가진 그가 나에게 화투장을 건네줄 때 살짝 손이 닿았다. 닿은 건 손인데 발가락이 찌릿했다. 옆에 있던 동기가 나에게 말했다.


"너 술 많이 취한 거야? 얼굴이 빨갛네"라고.


술은 무슨.




 4월의 어느 날, A는 동아리방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벚꽃 보러 가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나도 벚꽃 원정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는 내가 있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앙큼하기는. 포근한 날씨와 막 피기 시작한 벚꽃, 좋아하는 남자, 이 정도면 헌법도 인정할 휴강 사유였다. 나와 A, 그리고 한 무리의 동기들은 택시를 타고 선유도로 갔다.



  처음 가 본 선유도 공원은 폐 정수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봄으로 가득했다. 아직 지지 않은 개나리에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흩날리기 직전의 만개한 벚꽃 나무는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아름다웠다. 어설프게 멋부린 내 발이 힐 안에서 퉁퉁 부어가는 것도 모르고 눈치 없는 그는 내 옆에 붙어서 나에게 꽃말을 알려 줬다. 팻말에 붙어 있는 걸 미리 읽고 와서 설명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가 유식하다고 생각했다. 화장실 갈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내 옆에만 붙어 있었다. 오줌보가 터져 나갈 때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부러 내 옆에만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복학생들은 신입생들을 꼬시려고 안달이라는데. 나한테 안달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해야만 어른이 된다니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발가락을 찌릿하게 한 이 사람과.



 "연극 보러 갈 래?"


이미 벚꽃과 함께 그의 마음도 어느 정도 확인한 터라 그가 보낸 문자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둘이서 연극을 보고 밥을 먹고 술집 문이 닫을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헤어질 때에 나는 그에게 전날 밤부터 고르고 골라 온 말을 했다.


"나랑 연애할래요?"


그렇게 우리는 4월에 연인이 되었다.




 4월이 되면 그날의 선유도가 생각난다. A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선유도'라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아렸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유도를 봄꽃 놀이 장소로 추천한다. 그래, 봄은 아무 잘못이 없다. 지나간 봄은 그냥 지나가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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