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50~60년대 '새로운 물결'이라는 의미를 담은 프랑스 영화 사조 누벨바그를 이끈 인물 중 한 명이다. 사진작가, 배우, 다큐멘터리 감독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주체적인 여성' 이미지를 그려낸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는 어느덧 88세 노인이 됐다. 아녜스 바르다는 젊은 33세 포토 아티스트 JR과 함께 시골을 주 배경으로 사진 촬영에 나선다.
다큐멘터리 영화이지만 주요한 감정들을 위해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JR과 아녜스 바르다가 주고받는 대화가 각각 싱글 샷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카메라 두 대로 부차적인 테이크를 찍지 않고서도 가능한 방법이겠지만 어쨌거나 다분히 극영화적인 촬영을 고집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러닝 타임 상당 부분을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할애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예술 작품이 만들어진 후에 그 작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너와 내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결과들은 조심스럽게 내보인다. 하나의 빵을 문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이어 붙이자 그들은 단순히 그 마을의 주민에서 '먹을 것', 즉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다시 한번 재정립된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만날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의 사진을 벽에 붙임으로 모든 직원이 함께 모이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JR과 아녜스 바르다는 프랑스 곳곳을 다니며 그 집단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운다. 버려진 마을에 인물 사진을 붙인다는 발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마을에 '정말로' 사람들이 모여들 때 그건 진짜 새로운 것이 된다.
카페 여직원은 자신의 사진을 보고 ‘발이 머리보다 크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인간은 자기 얼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 보는 자신의 상에는 주관이 투영된다. 거울에 맺힌 상만 보던 인간은 자기 모습이 찍힌 사진 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질감을 느낀다. 자신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과 타자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 사이에는 간극이 큰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얼굴로 기억한다. 타자에 대한 감정과 그 속에 들어있는 많은 기억들을 우리는 단지 얼굴로 기억한다. 그 얼굴을 기록하는 일은 어쩌면 끝까지 기억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무너질 건물의 외벽과 창고와 물탱크 위에 남겨진 기록은 유한 중에서도 무한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묻어져 있는 것만 같다.
JR과 아녜스 바르다의 작업은 타자의 눈으로 본 자신의 모습을 홀로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전시를 통해 공유된다. Faces Places라는 영어 제목처럼 개인의 얼굴들을 장소에 배치시키는 이러한 작업은 일종의 토템화다. 조상의 사진을 자손의 집 외부에 붙여놓았을 때 자손 개인의 정체성이 외부와 소통하게 된다. 남성 위주의 노동자가 일하는 항만에 아내의 사진을 전시하면서 여성은 그 모습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준다.
JR과 아녜스 바르다는 작업 이외에도 시간을 같이 보낸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무덤을 가본다거나 JR의 할머니를 찾아간다거나 미술관을 찾아가고 장 뤽 고다르를 찾아가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함께 나눈다. 개인적인 시간들을 나누면서 두 예술가는 관계를 맺는다. 이들이 나누는 개인적 시간들은 그들이 고민하던 ‘이어짐’에 대한 하나의 예시가 된다. 33년을 88년을 따로 살아온 JR과 아녜스 바르다는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게 된다. 오프닝의 조율이 되지 않은 기타음이 엔딩에서 훌륭한 음악으로 바뀌며 끝나는 것도 이들이 이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